Sunday, September 29, 2019

사신과의 동거 #5

일주일하고도 하루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 미례는 상쾌한(?) 새벽공기를 들이마시다 얼굴을 찌푸렸다. '으웩! 매연이잖아. 퉤퉤.'

「누님. 창가에서 얼굴 떼세요. 위험합니다.」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미례를 말리며 재웅이 얼른 창문을 올렸다.

「그나저나 어제 대장하고 지내시는데 별일은 없으셨어요?」

「응? 으~응. 그저 그냥 지냈지 뭐.」

미례는 재웅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돌렸다. 어제 하루종일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그를 졸졸 따라다녔던 미례는 저녁 무렵에는
피곤함을 느끼고 지쳐서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혼자 떠들어야하는 어려움이 있기는 했지만 생각만큼 그와 보내는 시간들이 나쁘지는 않았다. 문득 조용히 있다 시선을 들 때면
그와 눈이 마주쳤고 그때 느끼는 이상한 감정들에 가슴이 설레던 것만 빼면 비교적 평온한 하루였다.

「이쪽으로 오세요, 누님.」

재웅은 한영그룹본사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 그녀를 데리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어디 가는 거야?」

재웅이 38층 버튼을 누르자 미례는 물어보았다. 이른 새벽부터 침묵의 사신인지는 일찌감치 집을 나가 버렸고
그녀 역시 일곱시가 채 되기도 전에 재웅의 손에 이끌려 이곳으로 온 것이다.

「곧 회장님을 만나게 될 거예요.」

「뭐 회장님? 그걸 이제 말해주면 어떻게 해? 이걸 어째! 화장도 못하고 나왔는데. 난 몰라!」

미례는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했다. 어차피 갇혀 지내며 주는 대로 먹고 입는 처지인지라 별 투정을 부리지는 않았지만
맨 얼굴로 그룹총수를 볼 생각을 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누님이 뭐가 어때서요? 예쁘시기만 한데요, 뭘.」

재웅은 그녀가 유난을 떠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어제 진규형님이 그녀를 위해 사다준 정장과 구두 차림의 미례는
그동안 집안에서 편안한 옷차림만 봐왔기 때문인지 그의 눈에는 예쁘게만 보였다.

「옷만 제대로 입으면 뭘 해? 얼굴에 화장을 못했잖아!」



어쩐지 옷을 쫙 빼 입힐 때 의심을 했어야 했는데.

「화장 안 해도 예뻐요, 누님. 정 마음에 걸리시면 나중에 화장품 사다 드릴게요.」

재웅은 미례를 안심시키며 빙긋 웃어주었다. 정말 여자들이란.

「나중에 언제? 회장님하고 만나고 난 뒤에 사다주면 뭐해? 화장 곱게 해서 누구에게 잘 보이라고?」

「혹시 알아요. 우리 대장이 누님에게 반할지.」

「뭐? 뭐가 어쩌고 어째? 야, 말만 들어도 끔찍하다. 두 번 다시 그런 말 하지마! 알았어?」

미례가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그를 다그쳤기에 재웅은 꼼짝도 못하고 고개만 간신히 끄덕였다.

「그런데 왜 회장님이 날 보자고 하시는 건데?」

사신인지 뭔지에게 날 맡겨두고 관심도 보이지 않을 때는 언제고, 흥! 이제야 나에게 고맙다고 인사라도 하려는 모양이지?
미례는 속으로 쫑알거리며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재웅을 따라 내렸다.

「어서 오십시오, 신미례씨.」

비서실로 들어서자 재웅 만큼이나 덩치가 큰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와 친절히 맞아 주었다.

「비서실장 이민석입니다.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지요?」

자신을 비서실장이라고 소개한 이민석은 그녀와 같은 나이에 외모도 비교적 준수한 남자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미례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얌전히 인사를 했다. 일면 대외 접대용 행동이라고나 할까.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민석은 회장실 문을 노크한 후 미례만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신미례씨 오셨습니다.」

「어서 오세요, 신미례씨.」

비서실장의 말에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젊은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걸어오며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회장님.」

미례는 넋을 놓고 회장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세상에, 정말 기가 막히게 잘생겼잖아?
가끔 신문이나 잡지 혹은 먼발치에서 그를 볼 기회가 있었지만 정면으로 얼굴을 대하기는 처음이었다.

「앉으세요, 신미례씨.」

회장의 권유에 쇼파에 앉으며 미례는 그제서야 쥰이 회장의 뒤쪽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뭐가 또 못마땅한지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저놈의 인상만 안 쓰면 회장 못지 않게 잘생긴 인물이구만,
왜 저렇게 얼굴을 구기고 있는 거야? 미례는 쥰을 흘낏 쳐다보다 다시 눈앞에 앉는 회장에게 관심을 집중시켰다.
드디어 회장을 만났으니 그동안 저놈의 사신이 한 짓을 모두 일러바치는 거야.

「진작 신미례씨에게 감사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경황이 없어서 인사가 늦었습니다.」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회장은 그윽한 목소리만큼이나 말솜씨도 좋았다. 더불어 살짝 짓는 미소가 백만불짜리였다.
쩝! 완전히 그림의 떡이구만.

「뭐 이제라도 하셨으니 괜찮아요.」

헉! 못살아. 여기서 진심을 말하면 어쩌자는 거야, 신미례! 내가 정말 너 땜에 못살아.
미례는 자신의 입을 쥐어박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제발 입 좀 다물고 있어.

「위트가 넘치는 분이시군요. 하하하」

다행히 회장은 미례가 농담을 했다고 생각하며 웃어 넘겨주었다.

「아직 설명을 듣지 못하셨겠지만 조금후면 한영그룹 임원진과 계열사 사장들이 모두 모일 겁니다.
지금 37층 회의실에 딸린 소 회의실 안에는 검찰에서 나온 사람들이 대기중이고요.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윤준호회장은 조심스런 표정으로 미례를 바라보았다.

「네. 결국 조세현사장을 잡으실 거라는 말씀이잖아요.」

그리고 나의 이 감옥 같은 생활도 끝이라는 말이고. 야호! 신난다!

「맞습니다. 그 자리에 신미례씨를 동석시킬 생각입니다. 괜찮으시겠어요?」

「물론이지요. 그 나쁜 놈을 잡는 자리에 제가 빠진다는 것은 말이 안되죠. 그런데 한가지 뭘 물어 봐도 될까요?」

회장에게 확답을 받아 놔야해. 나중에 딴소리 나오지 않게. 암! 세상에 믿을 놈, 아니 사람 하나도 없으니까.

「어려워 말고 말씀하세요.」

윤준호회장은 그녀에게 부드럽게 웃으며 질문을 재촉했다. 그렇게 선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면 속물인 내 자신이 미안해지잖아.

「혹시나 해서 여쭙는 건데요. 저 그러니까. 제가 말이에요...설마 짤린 건가요?」

하지만 미적거리는 것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았으므로 미례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윤준호회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아니 그룹 총수씩이나 되는 사람이 그렇게 말귀가 어두워서 어쩌누...쯧!

「그러니까 제가 실직 당한거냐구요. 한종금사장비서라는 자리에서 떨려져 나간 건지 묻는 거예요.」

「하하하. 정말 재미있으신 분이군요.」

윤준호회장은 정말 유쾌한 듯 가슴속에서 우러난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남은 밥줄이 걸린 일인데 농담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지.
내가 지금 포상금 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니잖아. 정당한 내 권리를 주장할 뿐이라구.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 조세현 사건만 무사히 해결되고, 신미례씨 안전이 확실해지면 다시 일하실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정말이지요?」

미례는 미심쩍은 얼굴로 시원스레 대답하는 회장에게 물었다.

「물론입니다. 이번에 받으신 피해보상까지 모두 해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우리 오빠에게 새로 사준 차를 혹시 제 퇴직금에서 제한다거나 그러지는 않는다는 뜻인가요?」

미례는 내침 김에 확답을 받아 두기로 마음먹었다.

「네? 새차라니요?」

윤준호회장은 의아한 듯한 시선을 창가 쪽에 조용히 서있는 쥰에게 던졌다.
쥰이 고개를 젖는 모습을 본 그는 다시 미례에게 시선을 돌렸다.

「차뿐이 아니라, 신미례씨 오피스텔의 파손된 곳와 물건들까지 완벽하게 새로 해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뭐가 파손되었다구요?」

미례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벌떡 일어났다.

「아, 진정하세요. 벌써 수리 들어가서 이번 주 안으로 완벽하게 고쳐드릴 겁니다. 물건들도 모두 새로 들여놓을 거구요.」

회장이 당황하며 그녀를 달래었지만 벌써 자리에서 일어난 미례는 냉큼 쥰의 코앞에 다가서 있었다.

「지금 내가 들은 말이 전부 무슨 소리예요? 이봐요, 잘난 벙어리 사신 양반.
내 집이 어떻게 되었다는 건지 그 입으로 한번 설명 좀 해보시죠?」

미례는 팔짱을 끼고 턱을 치켜올리며 그에게 도전적으로 물었다.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무심한 그의 시선과 분노로 이글거리는 그녀의 시선이 파지직 불꽃을 일으키며 부딪혔다.
두 사람만 특별한 공간에 갇힌 듯한 이상한 기류가 흐르는 가운데 한치의 양보도 없는 눈싸움이 벌어졌다.

「아, 벌써 시간이 되었군요. 그만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쥰?」

윤준호회장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 짐짓 자신의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두 사람의 긴장감을 깨뜨려주었다.
지금 두 사람의 싸움을 구경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아쉽지만 쥰이 어떻게 행동할지 지켜보는 일은 포기했다.

「좋아요, 벙어리 사신님. 나중에 이야기하죠. 아니지. 어차피 잠시 후에 조세현사장이 잡혀가면
당신이랑은 영영 빠이 빠이니 이야기 할 것도 없겠군요. 그동안 눈물나게 고마웠어요. 날 감금시켜두고 지켜줘서.
뭐 이것도 나중에 늙어서 추억거리가 되긴 하겠지만요.
어쨌든. 내 집을 최대한 빨리 원상복귀 시켜 놓는 게 당신 신상에 이로울 거예요.」

미례는 그의 손에 이끌려 한층 아래 인 37층 회의실로 이동하며 장황한 연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몇 십분 후 눈앞에서 조세현이 잡혀가는 것을 지켜보며 미례는 속이 후련해졌다.
그의 비리를 알게된 목요일부터 그가 잡혀가는 오늘까지
십여일에 걸쳐 겪어야 했던 고생들이 모두 깨끗이 씻겨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이제 다시 평범한 일상들로 돌아갈 생각으로
그녀는 가슴이 벅차오는 감동을 느꼈다. 그동안 지겹기만 했던 그녀의 삶이 얼마나 평온한 것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는 사건이었다.

다시 혼자만의 독신생활로 돌아갈 꿈에 부풀어 있던 미례는
재웅의 손에 이끌려 쥰의 아파트로 돌아 올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소리야? 여기서 나갈 수 없다니?」

자신의 물건들을 챙겨서 나가려는 그녀를 재웅이 막아섰다.

「대장님 명령이었습니다.」

그녀가 알던 어리버리 재웅이 아니었다. 절대로 그녀를 나갈 수 없게 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긴 재웅의 눈빛을 보며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농담이지? 지금 나 데리고 장난치는 거지? 조세현도 잡혀간 마당에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는데? 재웅아 이러지마.
이런 장난 하나도 재미없어. 아까 너도 봤잖아.」

미례는 억지로 웃으며 재웅을 달래었다.

「죄송합니다, 누님. 저도 어쩔 수 없어요. 광주출장안마 아시잖아요. 대장 명령 어기면 전 죽어요.
아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실 거라고요. 그럼 쉬세요.」

재웅은 그녀를 방에 집어넣고 첫날과 마찬가지로 문을 잠가 버렸다.

「야, 이 나쁜 놈아! 당장 문 열어! 무슨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어? 내가 왜 또 갇혀야 하는데? 이 나쁜 놈들아...엉엉」

미례는 문 앞에 매달려 두드리며 소리내어 울었다. 차라리 꿈이라도 꾸지 않았다면 나았을걸.
돌아갈 거라는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었는데.

「내가 뭘 잘못한 건데? 난 조세현에 대해서 알려준 일밖에 없잖아! 차라리 조세현 놈과 타협을 볼걸 그랬어! 엉엉」

미례는 분하고 원통해서 하루종일 울었다.







쥰은 자신의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오셨습니까?」

그의 직속 부하들이 아닌 경호실 소속 직원 두 명이 쇼파에서 일어나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쥰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짓으로 나가라고 명령했다. 신미례를 다시 가두는 일을 직속 부하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불러들인 경호실 직원 두 명은 조용히 그의 집을 나갔다.

「언제까지 이곳에 가둬둘 작정이에요?」

그가 냉장고의 디스펜서에 컵을 대고 얼음과 물을 따를 때 미례가 주방으로 들어와 앙칼지게 물었다.
그녀를 가둬두라는 자신의 명령을 어긴 재웅을 따끔하게 혼내줄 필요가 있었다. 요즘 들어 부쩍 말을 듣지 않고 미례를 감싸고도는
부하들의 군기를 단단히 잡을 생각이었다.

「당장 날 내보내주지 않으면 나도 더 이상은 못 참아요.」

그가 그녀를 무시하며 묵묵히 물을 마신 후 컵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거실로 나가버리자 미례는 화를 내며 뒤따랐다.

「조세현도 구속되었는데 왜 날 가둬두는 거냐고요!」

또다시 자신의 방으로 숨어들려는 쥰의 앞을 가로막으며 미례는 분노를 폭발시켰다. 쥰의 직속 부하들과는 달리 경호실
직원들은 하루종일 그녀를 무시하며 대꾸조차 하지 않았기에 미례의 신경은 한껏 날카로워져 있었다.

「날 내보내 달란 말이야, 이 나쁜 자식아!」

미례는 주먹을 쥐고 그의 가슴을 사정없이 치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갇혀 있던 분노와 울분, 그리고 무력감에서 오는 두려움을 모두
주먹에 담아 그에게 퍼부어 댔다.

「도대체 왜 날 가둬두는 거야. 이 나쁜 놈...엉엉...」

묵묵히 서서 그녀가 때리는 대로 맞아 주는 그보다 먼저 지쳐버린 미례는 미끄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난 더 이상 갇혀 있는 거 싫어. 나가고 싶다고. 내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싶단 말야.」

미례는 계속해서 울부짖으며 가슴속에 있는 말들을 끄집어냈다.

「혼자 지껄여 대는 것도 이젠 정말 지겨워. 할 일없이 집에서 빈둥거리는 것도 싫단 말야.
당신이야 입에서 곰팡이가 필 정도로 말을 안 하는 게 좋을지 모르겠지만 난 싫어!」

무릎을 모아 얼굴을 묻고 울던 미례는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손길에 움찔 놀랐다.

「뭐예요? 내보내 주겠다는 뜻이에요?」

미례는 얼굴을 들어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그를 노려보았다.

「누가 눈물 닦아 달래요? 내보내 달라고 했지. 당신이 날 가둬 두지만 않으면 내가 울 일이 뭐가 있어요?」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럽게 그녀의 볼을 닦아주는 그의 손을 야멸 차게 치우며 쏘아 부쳤다.

「내일은 날 집에 보내 줄 거죠?」

그의 부드러운 행동에 희망을 가진 미례는 눈물을 그치고 물었다.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왜요? 왜 안 된다는 거예요? 오늘 아침에 검찰에서 조세현을 잡아가는 거 당신도 똑똑히 봤잖아요?
그는 더 이상 날 해칠 수 없다구요. 난 내 집에 가고 싶어요!」

하지만 그는 그녀를 향해 다시 한번 고개를 저으며 안 된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도대체 이유가 뭐야? 말 좀 해봐! 답답하게 고개만 젓지 말고 말 좀 해보란 말야.」

악을 쓰는 그녀의 목이 잔뜩 쉬어 있었다. 하루종일 울었던 터에 그와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 나니 미례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 일어설 기운도 없었다.

「만지지마!」

그래도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을 뿌리칠 기운은 남아 있었다. 누가 이런 동정해 달라고 했나.
가둬두고 사람 피를 말리는 나쁜 인간 주제에 왜 위하는 척 하는 거야!

「갈 거야. 더 이상 이런 곳에 내가 있을 줄 알고!」

분노가 그녀에게 힘을 불어 넣어주었고 미례는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벌써 몇 번이나 시도해 봤기 때문에 가망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례는 문을 열기 위해 미친 듯이 손잡이를 돌렸다.
하지만 망할 놈의 사신이라는 남자는 자신의 집을 무슨 요새처럼 만들어 놔서 그녀의 힘으로는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미례는 좌절감에 문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빼며 바닥으로 미끄러지듯 주저앉아 격한 울음을 터트렸다.

「뭐 하는 짓이야? 안 내려나? 야! 당장 내려놔!」

어느새 다가와 그녀를 안아 올린 그는 가뿐히 걸음을 옮겨 미례가 묵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녀의 발버둥에도 끄덕도 하지 않고 침대 위에 내려놓은 그는 욕실로 들어가 물수건을 만들어 나왔다.

「정말 미치겠네. 왜 나이팅게일 흉내를 내는 건데?」

눈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주는 그의 행동에 당황하고 말았다.

「이런다고 내가 당신을 용서할 줄 알아? 내일 당장 경찰에 신고할거야.」

미례는 부드러운 그의 시선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계속해서 쇠된 소리를 질렀다.

「날 어쩌려는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 잘못 봤어, 사신씨.」

그는 그녀의 협박을 무시하며 얼굴을 닦아주는 일이 끝나자 시트를 끌어 올려 덮어주고 일어섰다.
나가기 전 뒤돌아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그는 전등스위치를 꺼주고 조용히 방문을 닫으며 나가버렸다.

「도대체 이유가 뭐냐고! 왜 날 가둬두는 건데? 날 어쩌려는 거야?」

어두운 방안에 그녀의 질문이 부딪혀 되돌아 왔다.







「당신을 어쩌면 좋을까?」

울음소리가 잦아지기를 기다렸던 쥰은 잠이든 그녀의 방을 찾아왔다.
깊은 잠에 빠져 오르락 내리는 그녀의 가슴을 지켜보던 그는 거친 호흡을 삼키며 시선을 돌렸다.

「왜 당신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는 거지?」

마치 잠이든 그녀에게 대답을 바라듯 쥰은 한참동안 미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땀에 젖은 곱슬거리는 붉은 머리를 치워주던 그의 손이 의지를 배반하고 매끄러운 볼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녀의 볼을 걸쳐 입술에 머무른 그의 손이 욕망으로 가늘게 떨렸다. 가지고 싶었다. 이 작고 수다스런,
정말 그를 미치게 만드는 이 여자를 품에 안고 싶다는 욕망이 그의 안에 자리 잡고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에게 목매던 수많은 미인들에게도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그였다. 그저 생리적인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그녀들을 이용해 왔던 그가 생전 처음으로 흔들리는 여자가 바로 신미례 그녀였다. 언제부터였는지는 그도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녀에게 기습 키스를 받았던 그때부터인지도,
아니면 그 골목길에서 당당하게 그를 대하던 그녀에게 끌리기 시작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당신에게 난 절대로 어울리는 상대가 아니야.' 쥰은 입밖에 내어 말하지 못하고 가슴으로만 속삭였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에서 손을 떼며 주먹을 쥐었다. 마치 그의 마음을 그 안에 가둬 두려는 듯.

「상처가 많은 당신을 위해 좋은 남자가 나타나겠지. 나 같은 놈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

쥰은 슬픈 눈길로 미례를 내려보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방을 나갔다.







푹 자고 일어난 미례는 어제 밤만큼 절망스럽지만은 않았다. 밝은 아침이 되자 쥰이라는 남자가 그녀를 가둬둘 권리가 없으니
곧 나갈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렇게 마냥 갇혀서 연락이 되지 않으면
그녀의 오빠들이나 부모님이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실종신고를 내실수도 있었고 그렇게 되면 그녀는 풀려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설마 그렇게 되기까지 몇 달 걸리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야 쥰의 직속 부하들이 그녀를 도와줄 수도 있었다. 미치광이 사신-어젯밤이후로 그렇게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의 횡포를 어쩌면 윤준호회장에게 말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최소한 회장은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였으니까.
하지만...유유상종이라고 똑같은 사람이면 어쩌지... 미례의 마음은 희망과 절망 속을 헤매고 있었다.

「이제 일어나셨어요, 누님?」

아침을 준비하던 종관이 그녀에게 활짝 웃어주는 것을 보며 미례는 마음이 놓였다.

「곧 식사준비가 끝날 거예요. 국만 끓으면 되니까 앉아서 기다리세요. 우유라도 한잔 드려요?」

「미치광이 사신이 오늘부터는 있어도 된데?」

미례는 식탁에서 의자를 빼내 앉으며 신랄한 어조로 물었다.

「미치광이 사신? 아, 우리 대장말이군요. 오늘부터 우리 네 명이 돌아가며 당번서기로 허락 받았어요.
어차피 이곳에 계실 거면 저희들이 누님을 모시고 싶어서요.」

종관은 능숙한 솜씨로 식탁을 차리며 설명해 주었다.

「날 모셔 달라고 부탁한 적 없으니 내보내 주기만 하라구.」

그녀가 무슨 조폭 두목도 아닌데 애들을 밑에 거느리고 뭘 하란 말인가? 이참에 전국구를 평정해 버려?

「저희들도 밤새 생각해 봤는데요. 역시 대장말씀이 옳은 것 같아요.」

「무슨 헛소리야?」

미치광이 사신 밑에 있더니 얘들까지 물들었나?

「조세현 보다는 그 공범자가 더 무서운 놈일 수도 있어요,
누님. 그러니 혹시라도 누님 혼자 집으로 돌려보냈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요?
역시 대장 말씀대로 이곳에 계시는 게 안전할 것 같다고 저희들도 의견일치를 봤어요.」

자못 진지한 폼이 그녀의 말이 먹혀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니까...말인 즉...조세현 공범자가 잡힐 때까지 여기 있어야 한다는 뜻이야?」

미례는 비명을 '빽' 지르고 말았다. 일주일이 조금 넘게 갇혀 있는 것도 간신히 참았는데
조세현의 공범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에 그놈이 잡히기만 기다려야 한다는 이 말이야 지금?

「네. 처음에는 누님이 워낙 집에 가시고 싶어하시니 저희들이 교대로 같이 가서 있을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누님 오피스텔이 너무 작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대장 집에 계시는 게 났겠다고 생각했어요.」

「누구 마음대로?」

「네?」

종관은 미례가 소리를 지르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자유스럽지는 않겠지만 그 좁고 볼품 없는 오피스텔보다는
넓고 쾌적한 환경의 이곳에서 지내는 게 훨씬 나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더구나 자신의 목숨이 달린 문제이니 미례도 양보하고 얌전히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누구 마음대로 정한 거냐고? 내가 죽던 말던 상관말고 날 내보내 줘.
난 더 이상 이 미치광이 집에서 살고 싶은 마음 없으니 당장 날 안 내보내 주면 가만 안 있을 거야!」

미례는 벌떡 일어나 악을 썼다.

「누님이 아무리 싫어하셔도 소용없어요. 대장이 한번 결정한 일은 무조건 따라야해요.」

「그래서 지금 날 내보내 주지 못하겠다는 뜻이야?」

「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들어 드릴수가 없어요. 이번 일은 대장 말이 옳으니까요.
왜 자꾸 집으로 가고 싶어하는지 모르지만. 목숨보다 소중한 건 없다고 생각해요.」

종관은 확고한 의지를 담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자꾸 여기서 나가려 하는 거냐고?' 미례는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왜냐하면 두려우니까. 십 년 전의 악몽이 되풀이될까 두려우니까.
또다시 한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만신창이가 될지도 모르니까.
난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겪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으니까.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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