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September 29, 2019

백설공주계모 #7 사신과의 동거

벌써 새벽 세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지만 그 나쁜 놈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미례는 자신이 왜 그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거실에는 진규가 쇼파에 누워
불편하게 불침번을 서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방안에서만 서성거리며 애꿎은 손톱만 물어뜯고 있을 뿐이었다.

누구 전화를 받고 그렇게 황급히 나갔던 것일까?
미례는 어떤 여자와 침대에서 뒹굴고 있는 그의 영상이 떠올라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 사보에도 실렸듯이 그에게 목매는 잘난 여자들이 길게 줄을 서서 차례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다는데
자신처럼 별 볼일 없는 여자에게 흥미를 느낄 리 없었다.
애인과 싸우고 나서 욕구불만으로 집에 들어왔는데 그녀가 옷들을 전부 물에 담가 버려서 홧김에 안으려 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정말 나쁜 놈이잖아! 비열한 자식!」

미례는 스스로의 생각만으로 그렇게 단정짓고 그를 향해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다면 아직까지 안 들어 올 리가 없잖아? 이 시간까지 안 들어오면 뻔한 것 아니겠어?
아이고, 분해. 그 변태자식한테 또 당했어.」

한순간 그의 품에서 몸이 달아올랐던 자신을 떠올리며 미례는 스스로의 머리를 양손으로 주먹 쥐고 마구 두드려주었다.

「이 바보 멍청이. 나이를 도대체 어디로 먹은 거야? 왜 자꾸만 잊어버리고 바보처럼 구는 건데?」

미례는 화장대 거울을 통해 비치는 자신을 향해 소리 질렀다.

「벌써 잊어버린 거야? 십 년 전 그 악몽을 벌써 잊어버린 거냐고? 제발 정신차려, 신미례!」

거울 속에서 어떤 여자가 울고 있었다. 너무나 서럽게 울고 있어서 바라보며 그녀도 한없이 울었다.

「미례씨 밤에 악몽 꿨어요?」

이튿날 진규가 아침을 차려주며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물론 그녀 혼자 식탁에 앉아 있었고 사신이라는 남자는 결국 집에 안 들어 왔다.

「왜요?」

미례는 퉁명스럽게 물으며 젓가락으로 마지못해 밥알을 집어 입안에 넣었다.

「아니 새벽에 이상한 소리가 미례씨 방에서 들려서요.」

「악몽 같은 것 꿀 시간도 없이 아주 푹 잘 잤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사신이 밤새 집에 안 들어 온 것이 진규의 잘못도 아닌데 미례는 그를 향해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참, 이상하네. 잘 잤다는 미례씨가 왜 오늘따라 저기압이지?」

진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해했다.

「오늘 당번은 지산씨 아니었어요? 진규씨 출근 안 해요?」

「지산형은 요즘 하는 일이 바빠서 당분간 못 와요. 대신 오늘은 종관이가 올 거예요. 난 오늘 대장 옷 사러 다녀야 하거든요.」

자신의 밥을 그릇에 담아 맞은편에 앉으며 진규가 말하자 미례는 조금 미안해졌다.

어쨌든 그녀가 한 짓 덕분에 사신의 옷장을 전부 새로 채우려면 돈깨나 깨질 것이다. 모두 값비싼 옷들이었는데...
사실 물에 담그면서 아깝기는 했었다. 아마 그녀의 오빠들과 체격이 비슷했다면 몇 개는 빼돌렸을 텐데...
그녀의 집안식구들은 모두 키가 작아서 오빠들도 간신히 백칠십을 넘는 정도였다.
막내오빠가 그나마 제일 컸지만 사신의 키에는 못 미쳤다. 허리만 맞아도 대충 잘라서 입으라고 할 수 있었는데...
근육질의 잘 빠진 사신과는 달리 현웅오빠는 배가 좀 많이 나온 편이었다. 그러니 아직까지 장가도 못 갔지.

「흥! 돈이 남아도나 보지.」

여전히 들어오지 않은 그에게 틀어진 마음은 풀리지 않았고 속마음과는 달리 입에서는 곱지 않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주방도 새로 싹 바꾸더니 이번엔 옷들을 새로 장만하려는 모양이야. 대충 사용하고 입으면 될걸.」

「재웅이가 열심히 청소해 봤는데 도저히 원래대로 만들 수 없었나 봐요. 그러니 전부 새로 살수 밖 에요.
우리 대장은 완벽하지 않으면 못 참거든요. 더러운 꼴도 못 보고요. 누가 쓰던 물건은 절대로 사용하지 않아요.
최고급 아니면 몸에 걸치지도 않는걸요.」

진규는 미례의 비난에서 자신의 대장을 감싸기 위해 열심히 변명했지만 그녀의 심술보를 더욱 건드릴 뿐이었다.

「돈 많다고 자랑하는 거야 뭐야? 태어날 때부터 금 수저 물고 나왔나 보지? 그럴 돈 있으면 불우이웃 돕기라도 하면 좀 좋아?」

「우리 대장 금 수저 물고 나온 건 어떻게 알았어요?」

입에 거품까지 물어 가며 말하는 미례를 향해 진규가 히죽 웃었다.

「뭐, 뭐라고요? 지금 나 놀리는 거예요?」

「그만 흥분하시고 어서 식사하세요. 아마 대장은 곧장 회사로 나가시려나 보네요. 어제는 어디서 주무신 거지?」

진규는 미례를 달래고 자신의 밥그릇에 시선을 돌려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자기 부하들도 대장이 어디서 잠을 잔 건지 모르게 하고 도대체 어딜 빨빨거리고 다니는 거야?
날 자기 집에다 데려다 놨으면 본인이 책임져야지 왜 뻑 하면 부하들에게 떠넘기는 건데?
정말 하나에서 열까지 정이 안가는 인간이야! 미례는 씩씩거리며 아침식사를 마쳤다.
그에 대해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하고 억울했다.



「회장님과 쥰님이 함께 아침을 드시는 게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요, 그렇지요?」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쥰과 준호의 곁에서 시중을 들며 전주댁은 활짝 웃음을 지었다.

「글쎄 말이에요. 어제는 형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곳에서 잠을 잤는지 모르겠네요.」

준호는 맞은편에 앉은 쥰을 보며 다 이해한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혹시 또 모르죠. 집에서 쫓겨났는지도.」

「네~에?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회장님? 쥰님이 왜 본인 집에서 쫓겨나는데요?
쫓아낼 사람이 함께 살고 있다면 몰라도 혼자사시는 분을 누가 쫓아내겠어요.」

전주댁은 준호의 말이 가당치 않다는 듯 대꾸했다.

「다 드셨으면 출근하시죠, 회장님.」

쥰은 물 컵을 들어 마신 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준호를 흘겨보았다.

준호에게 놀림 받을 줄 뻔히 알면서도 어젯밤 병원에서 이곳으로 온 자신이 어리석었다.
차라리 호텔에서 잘걸 그랬다고 쥰은 뒤늦게 후회를 해보았다.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이곳으로 온 거라고 마음속으로 변명해 보았지만 별 효력은 없었다.
물론 성북동 저택에는 항상 그가 오면 묵을 수 있는 방이 있었고 그 방에는 자신의 옷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이곳으로 도망치듯 온 것은 미례에게 끌리는 자신을 제어 할 자신이 없어서라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런 감정은 옳지 못하다고 쥰은 자신에게 주지시켰다. 신미례는 그에게 경호대상이었다.
그 대상을 상대로 특별한 감정을 품는 것은 일을 그르칠 위험이 될 수도 있었다.

이십 년 전 부친의 목숨을 구해준 노회장의 은혜를 갚기 위해 그는 준호의 경호원이자 보호자가 되기 위해 한국으로 왔다.
그리고 준호와 그는 주종관계를 떠나 친형제 이상의 애정을 서로에게 주며 지내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준호가 위험에 빠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자신의 실수 때문에 잘못했으면 준호를 영원히 잃을 뻔했다는 자책감을 쥰은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의 나이가 어렸고 경험이 부족한 이유도 있었지만 준호가 납치를 당했던 순간 판단을 잘못 내렸던 것은 준호에 대한
그의 특별한 감정 때문이었다고 쥰은 생각했다. 물론 곧 준호가 구출되었지만 쥰은 그때의 뼈아픈 경험을 잊지 않고 있었다.

경호대상에 대한 사적인 감정은 판단착오를 가져오게 할 수 있다고 쥰은 스스로에게 경고했다.
신미례가 안전하기를 원한다면 그녀의 목숨이 그의 손에 달려 있는 이상 냉정하게 대해야 했다.
절대로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끌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신미례씨는 잘 지내고 있지, 형?」

회사로 향하는 차안에서 준호는 여전히 그를 놀리고 있었다.

「회장님께서 신미례씨 걱정까지 하실 여유가 있으신 줄 몰랐는데요?」

쥰 역시 지지 않고 대꾸했다.

「무슨 뜻이야?」

「최근 한지연씨 주위에 달라붙는 남자직원들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쥰은 미례에 대해서 놀리는 준호가 얄미워 그냥 한번 해본 말이었는데 그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마!」

갑자기 얼굴이 붉어진 준호가 화를 내며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던 것이다.

'흠! 이거 생각보다 한지연에 대한 관심이 보통이 아닌데?'

쥰은 괜히 노회장님께 연이에 대한 준호의 마음을 이야기 한 것은 아닐까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미례는 전화기를 노려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가 전화를 할 리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보며 화가 치밀었다.

「종관아.」

미례는 오후가 되자 약이 올라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 종관을 불렀다.

「네, 누님.」

종관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주방에서 나와 거실 쇼파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미례를 보았다.

「호신술 좀 가르쳐 줘봐.」

「네? 호신술이요?」

종관은 장렬한 표정까지 짓고 있는 미례를 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그래, 호신술. 왜 있잖아. 남자들이 덮칠 때 몸을 지킬 수 있는 방법 말이야.」

「아, 그거요. 지금 당장 가르쳐 드려요?」

아마 이번 일을 겪고 나서 자신의 몸을 지키는 방법에 관심을 가진 모양이라고 종관은 나름대로 추측했다.

「물론이지. 지금 당장 가르쳐 줘. 간단하면서도 아주 효과가 빠른 걸로.」

물론 미례는 자신을 납치해서 해치려던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 호신술을 배우려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러니까 거기만 한방 차면 남자들은 모두 끝장난단 말이지?」

「네, 누님.」

종관은 미례에게 알려 주면서도 그녀의 살벌한 눈빛을 보며 조금은 불안감을 느꼈다. 뭐 별일이야 있겠어.

한 며칠 일찍 들어온다 싶었던 그가 어제는 외박하더니 오늘은 자정이 다되어서야 집에 들어 왔다.
미례는 그가 입고 있는 옷이 전날 입고 나갔던 양복과 와이셔츠, 넥타이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고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바람둥이! 카사노바!」

곧장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그의 등뒤에 대고 외쳤다.

「흥! 어떤 여자랑 밤새 놀다 지금에서야 들어오는지 모르겠지만, 날 이곳에 가둬두고 혼자만 재미보고 다니다니 정말 양심도 없어!」

몸을 돌려 그녀를 마주보는 무표정한 얼굴의 그에게 신랄하게 소리질렀지만
자신이 질투를 하고 있다는 것도 미례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날 언제 이곳에서 내보내 줄 거예요? 아, 조세현 공범자를 잡아야 풀어준다는 뻔한 거짓말하지 말고요.
혹시 내가 겁을 집어먹고 증언을 해주지 않을 까봐 걱정되어서 날 가둬두고 있다면 안심해도 되요.
절대로 도망치지 않고 반드시 법정에 나가서 조세현이 한 짓을 낱낱이 밝혀 줄 테니까 안심하고 날 풀어줘요.」

미례는 하루종일 곰곰이 생각해서 자신을 가둬둔 그의 이유를 드디어 밝혀낸 스스로가 너무나 대견하다는 듯 만족스럽게 미소지었다.
쥰은 물끄러미 미례를 내려다보며 잠시 그녀를 엎어두고 엉덩이를 때려 줄지 아니면 터무니 없는 상상을 지껄이는
그녀의 입술을 막아 버릴지 고민해 보았다. 하지만 둘 다 포기하고 자신의 확고한 결심을 밀고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경호대상과 사적인 감정에 얽히지 않는다. 신미례의 안전이 확실해지면 그때 그녀를 가진다는 계획을 반드시 지킬 것이다.

「자, 언제 내보내 줄 거예요? 우리말 잘 못해서 말 안 하는 거지요? 다 이해해요. 저도 일본어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걸요.
다른 나라 말 잘 못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에요.
그래도 정 당신이 자존심 때문에 말하지 못하겠으면 일본어로 말해도 상관없어요. 내가 알아 들을 수 있으니까요.」

미례는 그를 위로하기라도 하듯 자못 너그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쥰은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저 입을 막아 버리지 못한다면 밤새 시달릴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저 붉은 입술의 유혹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성큼 그녀에게 다가선 쥰은 그녀의 입술을 찍어 내리듯 거칠게 취했다. 참으려 했던,
억누르려 했던 그녀를 향한 욕망이 들끓어 올라 삼켜버릴 듯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윽!」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쥰은 허리를 꺾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미례의 무릎이 정확히 그의 중심을 가격했던 것이다.

「이 나쁜 놈아!」

미례는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쥰을 내려다보며 소리를 냅다 지르고는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도망쳐 얼른 문을 등지고 섰다.

「흥! 밤새 어떤 여자를 품에 안고 있다 와 놓고는 감히 날 건들어! 이 신미례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어림없어!」

금방이라도 문을 밀고 그가 쳐들어올까 두려웠지만 애써 용기를 낸 미례는 당당하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밖에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이걸 가르쳐 주던 종관이 잘못하면 남자가 고자가 될 수도 있다고 했는데....

미례는 그가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혹은 정말 병원에 갈 정도로 위독한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어 방문을 살짝 열어 보았다.
하지만 그가 쓰러져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어딜 간 걸까? 미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얼굴을 더 밖으로 내밀어 보았다.

「엄마야!」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손이 문을 확 잡아 열자 미례는 밖으로 몸이 꼬꾸라지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바닥에 얼굴을 박기 전에 그가 받아 안아 올려 방안으로 들어왔다.

「악! 내려놔!」

하지만 아무리 그녀가 버둥거려도 상무지구 출장 그는 그녀를 안은 채로 침대위로 올라갔다.

「악! 아파! 뭐 하는 짓이야?」

혹시 어제 밤 못한 일을 마저 하기 위해 자신을 침대로 데리고 온 것은 아닐까
가슴을 졸이던-절대 기대감은 아니얏!-미례는 엉덩이에 격렬한 아픔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이...바보 멍청이. 나쁜 놈. 미치광이 사신 놈아! 당장 날 놓아주지 못해!」

계속해서 자신의 엉덩이를 때리는 그의 손바닥을 피해 몸부림을 치며 미례는 펑펑 울기 시작했다.

「두고봐. 반드시 복수하고 말 거야.」

드디어 그의 손에서 풀려난 미례는 불이 붙은 듯이 화끈거리는 엉덩이를 매만지며 두 눈에 독기를 품고 그를 노려보았다.

「확 고자나 되 버려라!」

미례는 방에서 나가는 그의 등뒤에 대고 악담을 퍼부었지만 그가 다시 몸을 돌리자 움찔 놀랐다.
다행히 그는 그녀를 한번 노려보고는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미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향했다.
아마 내일이면 엉덩이가 원숭이 엉덩이처럼 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다음날 당번인 재웅은 아침을 준비하며 두 사람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다. 대장이나 누님이나 심기가
대단히 불편한 듯 식사도 건성이었으며 왠지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밤새 둘이 싸우기라도 했나? 재웅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사람과 좀 떨어져서 아침을 먹었다.

「누님 있잖아요.」

쥰이 출근하고 재웅을 도와 함께 집안 청소를 하고 있을 때 그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왜?」

밤새 분통이 터져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미례는 심통 사납게 물었다.

「그게 말이에요. 여자들은 말이에요...」

가뜩이나 엉덩이도 아프고 잠도 못 잔데다 사신인지 뭔지에게 어떻게 분풀이를 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인데
재웅이까지 말을 빙빙 돌리자 미례는 짜증이 났다.

「빨랑 용건만 말해.」

「저...그러니까 여자들은 어떤 남자를 좋아해요?」

미례가 화가 난 듯 재촉하자 재웅은 얼른 물어 보았다.

「무슨 소리야?」

설마 이 어린놈이 날 좋아한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미례는 섬뜩한 생각이 들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니까요, 여자들은 어떤 남자에게 호감을 갖느냐구요.」

재웅은 답답한 듯 물으며 손에 들고 있던 걸레를 내려놓았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묻는데? 너 혹시 좋아하는 사람 생겼냐?」

미례는 슬쩍 재웅을 떠보았다. 그런데 의외로 재웅이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었다.

「너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거야? 누군데?」

'제발 난 아니라고 해주라. 난 삐악삐악 병아리는 정말 싫어! 난 연하는 싫단 말야!'

「그...그게...」

'아이고 답답해. 그래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 무슨 죄가 있겠니. 그저 내가 조금 빼어난 미모를 가진 것이 죄라면 죄지.
에고 이 어린 것 가슴에 어찌 못을 박누.'

「비서실에요... 새로... 여직원이 왔는데요...」

'오잉? 이건 또 뭔 소리야?'

「저...이름은 한지연씬데요...올해 대학교를 졸업하고 입사했는데...스물셋이거든요...」

「잠깐! 그러니까. 회장님 비서로 여비서가 들어왔다는 그 말이야? 그 여비서에게 넌 한눈에 반한 거고?」

미례는 잠시 재웅의 말을 막으며 교통정리를 해보았다.

「네. 한지연씨는 정말 예뻐요.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온 줄 알았다니까요. 제 주먹보다 작은 새하얀 얼굴에 또 눈은 얼마나 큰데요.
새카만 긴 생 머리는 거의 허리까지 내려오더라구요. 키도 크고 굉장히 날씬해서 슈퍼모델 저리가라에요.」

한번 열린 재웅의 입은 거침없이 그 여비서에 대한 칭찬들을 쏟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리회장님 여비서 안 두시잖아? 예전에 어떤 여비서 때문에 크게 데인 뒤부터 절대 여비서 안 두시고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

「한지연씨가요 미모만 빼어난 게 아니에요, 누님. 머리도 굉장히 좋아서 이번에 수석입사했거든요.
그런데 회장비서실을 지원해서 회장님께서 어쩔 수 없이 발령내신거래요.」

「그래서 넌 지금 그 여비서에게 한눈에 반해서 어떻게 하면 마음에 들까 고민하는 중이고?」

미례는 지금 재웅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도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배신감을 느껴야 하는 건지
잠시 고민을 해보았다.

「네. 그런데... 한지연씨에게 관심을 보이는 직원이 한 두 명이 아니에요.
경호실 직원들은 물론이고 회사 내 모든 총각사원들이 수시로 비서실을 들락거리며 그녀에게 접근하려 하고 있어요.」

재웅은 풀이 죽어 중얼거렸다.

「전 직원들이 그 여비서에게 반해버렸단 말이야?」

미례는 그 여비서와 즐겁게 웃고 있는 쥰의 모습을 떠올리며 재웅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네. 거의 모든 직원들이 그럴걸요. 그런데... 그녀는 너무 차가워요.」

「차갑다니 무슨 소리야? 성격이 나쁜 거야?」

쥰이 그 여비서에게 관심을 가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조바심이 나는 미례였다.

「그렇지 않아요. 얼마나 착한데요. 문제는 너무나 예의바르고 깍듯이 대하는 거예요. 도무지 곁을 주지 않아요.」

「미인에다 마음씨까지 착한 단 말야?」

'거기다 머리까지 좋고? 세상에 그런 여자가 어디 있어?' 미례는 재웅이 그 여비서에게 반했기 때문에 좋게 말한다고 생각했다.

「네. 그런데....」

재웅은 머뭇거리며 망설였다.

「그런데, 뭘?」

「그녀에게 정혼자가 있다는 소문이 파다해요.」

「정혼자? 약혼했다는 뜻이야?」

임자 있는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재웅의 말에 미례는 마음속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약혼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정해준 결혼상대자가 있다는 말이 돌고 있어요.
굉장한 집안 남자라는데... 역시 한지연씨처럼 대단한 미인에게 애인이 없을 리 없겠죠?」

「실망하기에는 아직 일러, 재웅아.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재웅이 네가 어디가 어때서?
너처럼 착하고 바르며 성실한 남자도 없잖아. 기운 내. 이 누나가 널 적극적으로 밀어 줄게.」

미례는 풀이 죽어 있는 재웅의 등을 사정없이 치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한지연이라... 기회가 된다면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얼마나 아름답기에 재웅이 이렇게 전전긍긍하는 걸까?
설마 그놈의 사신마저도 그 여비서에게 넘어간 것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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