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September 29, 2019

백설공주계모 #7 사신과의 동거

벌써 새벽 세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지만 그 나쁜 놈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미례는 자신이 왜 그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거실에는 진규가 쇼파에 누워
불편하게 불침번을 서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방안에서만 서성거리며 애꿎은 손톱만 물어뜯고 있을 뿐이었다.

누구 전화를 받고 그렇게 황급히 나갔던 것일까?
미례는 어떤 여자와 침대에서 뒹굴고 있는 그의 영상이 떠올라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 사보에도 실렸듯이 그에게 목매는 잘난 여자들이 길게 줄을 서서 차례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다는데
자신처럼 별 볼일 없는 여자에게 흥미를 느낄 리 없었다.
애인과 싸우고 나서 욕구불만으로 집에 들어왔는데 그녀가 옷들을 전부 물에 담가 버려서 홧김에 안으려 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정말 나쁜 놈이잖아! 비열한 자식!」

미례는 스스로의 생각만으로 그렇게 단정짓고 그를 향해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다면 아직까지 안 들어 올 리가 없잖아? 이 시간까지 안 들어오면 뻔한 것 아니겠어?
아이고, 분해. 그 변태자식한테 또 당했어.」

한순간 그의 품에서 몸이 달아올랐던 자신을 떠올리며 미례는 스스로의 머리를 양손으로 주먹 쥐고 마구 두드려주었다.

「이 바보 멍청이. 나이를 도대체 어디로 먹은 거야? 왜 자꾸만 잊어버리고 바보처럼 구는 건데?」

미례는 화장대 거울을 통해 비치는 자신을 향해 소리 질렀다.

「벌써 잊어버린 거야? 십 년 전 그 악몽을 벌써 잊어버린 거냐고? 제발 정신차려, 신미례!」

거울 속에서 어떤 여자가 울고 있었다. 너무나 서럽게 울고 있어서 바라보며 그녀도 한없이 울었다.

「미례씨 밤에 악몽 꿨어요?」

이튿날 진규가 아침을 차려주며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물론 그녀 혼자 식탁에 앉아 있었고 사신이라는 남자는 결국 집에 안 들어 왔다.

「왜요?」

미례는 퉁명스럽게 물으며 젓가락으로 마지못해 밥알을 집어 입안에 넣었다.

「아니 새벽에 이상한 소리가 미례씨 방에서 들려서요.」

「악몽 같은 것 꿀 시간도 없이 아주 푹 잘 잤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사신이 밤새 집에 안 들어 온 것이 진규의 잘못도 아닌데 미례는 그를 향해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참, 이상하네. 잘 잤다는 미례씨가 왜 오늘따라 저기압이지?」

진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해했다.

「오늘 당번은 지산씨 아니었어요? 진규씨 출근 안 해요?」

「지산형은 요즘 하는 일이 바빠서 당분간 못 와요. 대신 오늘은 종관이가 올 거예요. 난 오늘 대장 옷 사러 다녀야 하거든요.」

자신의 밥을 그릇에 담아 맞은편에 앉으며 진규가 말하자 미례는 조금 미안해졌다.

어쨌든 그녀가 한 짓 덕분에 사신의 옷장을 전부 새로 채우려면 돈깨나 깨질 것이다. 모두 값비싼 옷들이었는데...
사실 물에 담그면서 아깝기는 했었다. 아마 그녀의 오빠들과 체격이 비슷했다면 몇 개는 빼돌렸을 텐데...
그녀의 집안식구들은 모두 키가 작아서 오빠들도 간신히 백칠십을 넘는 정도였다.
막내오빠가 그나마 제일 컸지만 사신의 키에는 못 미쳤다. 허리만 맞아도 대충 잘라서 입으라고 할 수 있었는데...
근육질의 잘 빠진 사신과는 달리 현웅오빠는 배가 좀 많이 나온 편이었다. 그러니 아직까지 장가도 못 갔지.

「흥! 돈이 남아도나 보지.」

여전히 들어오지 않은 그에게 틀어진 마음은 풀리지 않았고 속마음과는 달리 입에서는 곱지 않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주방도 새로 싹 바꾸더니 이번엔 옷들을 새로 장만하려는 모양이야. 대충 사용하고 입으면 될걸.」

「재웅이가 열심히 청소해 봤는데 도저히 원래대로 만들 수 없었나 봐요. 그러니 전부 새로 살수 밖 에요.
우리 대장은 완벽하지 않으면 못 참거든요. 더러운 꼴도 못 보고요. 누가 쓰던 물건은 절대로 사용하지 않아요.
최고급 아니면 몸에 걸치지도 않는걸요.」

진규는 미례의 비난에서 자신의 대장을 감싸기 위해 열심히 변명했지만 그녀의 심술보를 더욱 건드릴 뿐이었다.

「돈 많다고 자랑하는 거야 뭐야? 태어날 때부터 금 수저 물고 나왔나 보지? 그럴 돈 있으면 불우이웃 돕기라도 하면 좀 좋아?」

「우리 대장 금 수저 물고 나온 건 어떻게 알았어요?」

입에 거품까지 물어 가며 말하는 미례를 향해 진규가 히죽 웃었다.

「뭐, 뭐라고요? 지금 나 놀리는 거예요?」

「그만 흥분하시고 어서 식사하세요. 아마 대장은 곧장 회사로 나가시려나 보네요. 어제는 어디서 주무신 거지?」

진규는 미례를 달래고 자신의 밥그릇에 시선을 돌려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자기 부하들도 대장이 어디서 잠을 잔 건지 모르게 하고 도대체 어딜 빨빨거리고 다니는 거야?
날 자기 집에다 데려다 놨으면 본인이 책임져야지 왜 뻑 하면 부하들에게 떠넘기는 건데?
정말 하나에서 열까지 정이 안가는 인간이야! 미례는 씩씩거리며 아침식사를 마쳤다.
그에 대해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하고 억울했다.



「회장님과 쥰님이 함께 아침을 드시는 게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요, 그렇지요?」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쥰과 준호의 곁에서 시중을 들며 전주댁은 활짝 웃음을 지었다.

「글쎄 말이에요. 어제는 형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곳에서 잠을 잤는지 모르겠네요.」

준호는 맞은편에 앉은 쥰을 보며 다 이해한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혹시 또 모르죠. 집에서 쫓겨났는지도.」

「네~에?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회장님? 쥰님이 왜 본인 집에서 쫓겨나는데요?
쫓아낼 사람이 함께 살고 있다면 몰라도 혼자사시는 분을 누가 쫓아내겠어요.」

전주댁은 준호의 말이 가당치 않다는 듯 대꾸했다.

「다 드셨으면 출근하시죠, 회장님.」

쥰은 물 컵을 들어 마신 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준호를 흘겨보았다.

준호에게 놀림 받을 줄 뻔히 알면서도 어젯밤 병원에서 이곳으로 온 자신이 어리석었다.
차라리 호텔에서 잘걸 그랬다고 쥰은 뒤늦게 후회를 해보았다.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이곳으로 온 거라고 마음속으로 변명해 보았지만 별 효력은 없었다.
물론 성북동 저택에는 항상 그가 오면 묵을 수 있는 방이 있었고 그 방에는 자신의 옷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이곳으로 도망치듯 온 것은 미례에게 끌리는 자신을 제어 할 자신이 없어서라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런 감정은 옳지 못하다고 쥰은 자신에게 주지시켰다. 신미례는 그에게 경호대상이었다.
그 대상을 상대로 특별한 감정을 품는 것은 일을 그르칠 위험이 될 수도 있었다.

이십 년 전 부친의 목숨을 구해준 노회장의 은혜를 갚기 위해 그는 준호의 경호원이자 보호자가 되기 위해 한국으로 왔다.
그리고 준호와 그는 주종관계를 떠나 친형제 이상의 애정을 서로에게 주며 지내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준호가 위험에 빠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자신의 실수 때문에 잘못했으면 준호를 영원히 잃을 뻔했다는 자책감을 쥰은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의 나이가 어렸고 경험이 부족한 이유도 있었지만 준호가 납치를 당했던 순간 판단을 잘못 내렸던 것은 준호에 대한
그의 특별한 감정 때문이었다고 쥰은 생각했다. 물론 곧 준호가 구출되었지만 쥰은 그때의 뼈아픈 경험을 잊지 않고 있었다.

경호대상에 대한 사적인 감정은 판단착오를 가져오게 할 수 있다고 쥰은 스스로에게 경고했다.
신미례가 안전하기를 원한다면 그녀의 목숨이 그의 손에 달려 있는 이상 냉정하게 대해야 했다.
절대로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끌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신미례씨는 잘 지내고 있지, 형?」

회사로 향하는 차안에서 준호는 여전히 그를 놀리고 있었다.

「회장님께서 신미례씨 걱정까지 하실 여유가 있으신 줄 몰랐는데요?」

쥰 역시 지지 않고 대꾸했다.

「무슨 뜻이야?」

「최근 한지연씨 주위에 달라붙는 남자직원들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쥰은 미례에 대해서 놀리는 준호가 얄미워 그냥 한번 해본 말이었는데 그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마!」

갑자기 얼굴이 붉어진 준호가 화를 내며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던 것이다.

'흠! 이거 생각보다 한지연에 대한 관심이 보통이 아닌데?'

쥰은 괜히 노회장님께 연이에 대한 준호의 마음을 이야기 한 것은 아닐까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미례는 전화기를 노려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가 전화를 할 리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보며 화가 치밀었다.

「종관아.」

미례는 오후가 되자 약이 올라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 종관을 불렀다.

「네, 누님.」

종관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주방에서 나와 거실 쇼파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미례를 보았다.

「호신술 좀 가르쳐 줘봐.」

「네? 호신술이요?」

종관은 장렬한 표정까지 짓고 있는 미례를 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그래, 호신술. 왜 있잖아. 남자들이 덮칠 때 몸을 지킬 수 있는 방법 말이야.」

「아, 그거요. 지금 당장 가르쳐 드려요?」

아마 이번 일을 겪고 나서 자신의 몸을 지키는 방법에 관심을 가진 모양이라고 종관은 나름대로 추측했다.

「물론이지. 지금 당장 가르쳐 줘. 간단하면서도 아주 효과가 빠른 걸로.」

물론 미례는 자신을 납치해서 해치려던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 호신술을 배우려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러니까 거기만 한방 차면 남자들은 모두 끝장난단 말이지?」

「네, 누님.」

종관은 미례에게 알려 주면서도 그녀의 살벌한 눈빛을 보며 조금은 불안감을 느꼈다. 뭐 별일이야 있겠어.

한 며칠 일찍 들어온다 싶었던 그가 어제는 외박하더니 오늘은 자정이 다되어서야 집에 들어 왔다.
미례는 그가 입고 있는 옷이 전날 입고 나갔던 양복과 와이셔츠, 넥타이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고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바람둥이! 카사노바!」

곧장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그의 등뒤에 대고 외쳤다.

「흥! 어떤 여자랑 밤새 놀다 지금에서야 들어오는지 모르겠지만, 날 이곳에 가둬두고 혼자만 재미보고 다니다니 정말 양심도 없어!」

몸을 돌려 그녀를 마주보는 무표정한 얼굴의 그에게 신랄하게 소리질렀지만
자신이 질투를 하고 있다는 것도 미례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날 언제 이곳에서 내보내 줄 거예요? 아, 조세현 공범자를 잡아야 풀어준다는 뻔한 거짓말하지 말고요.
혹시 내가 겁을 집어먹고 증언을 해주지 않을 까봐 걱정되어서 날 가둬두고 있다면 안심해도 되요.
절대로 도망치지 않고 반드시 법정에 나가서 조세현이 한 짓을 낱낱이 밝혀 줄 테니까 안심하고 날 풀어줘요.」

미례는 하루종일 곰곰이 생각해서 자신을 가둬둔 그의 이유를 드디어 밝혀낸 스스로가 너무나 대견하다는 듯 만족스럽게 미소지었다.
쥰은 물끄러미 미례를 내려다보며 잠시 그녀를 엎어두고 엉덩이를 때려 줄지 아니면 터무니 없는 상상을 지껄이는
그녀의 입술을 막아 버릴지 고민해 보았다. 하지만 둘 다 포기하고 자신의 확고한 결심을 밀고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경호대상과 사적인 감정에 얽히지 않는다. 신미례의 안전이 확실해지면 그때 그녀를 가진다는 계획을 반드시 지킬 것이다.

「자, 언제 내보내 줄 거예요? 우리말 잘 못해서 말 안 하는 거지요? 다 이해해요. 저도 일본어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걸요.
다른 나라 말 잘 못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에요.
그래도 정 당신이 자존심 때문에 말하지 못하겠으면 일본어로 말해도 상관없어요. 내가 알아 들을 수 있으니까요.」

미례는 그를 위로하기라도 하듯 자못 너그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쥰은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저 입을 막아 버리지 못한다면 밤새 시달릴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저 붉은 입술의 유혹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성큼 그녀에게 다가선 쥰은 그녀의 입술을 찍어 내리듯 거칠게 취했다. 참으려 했던,
억누르려 했던 그녀를 향한 욕망이 들끓어 올라 삼켜버릴 듯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윽!」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쥰은 허리를 꺾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미례의 무릎이 정확히 그의 중심을 가격했던 것이다.

「이 나쁜 놈아!」

미례는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쥰을 내려다보며 소리를 냅다 지르고는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도망쳐 얼른 문을 등지고 섰다.

「흥! 밤새 어떤 여자를 품에 안고 있다 와 놓고는 감히 날 건들어! 이 신미례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어림없어!」

금방이라도 문을 밀고 그가 쳐들어올까 두려웠지만 애써 용기를 낸 미례는 당당하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밖에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이걸 가르쳐 주던 종관이 잘못하면 남자가 고자가 될 수도 있다고 했는데....

미례는 그가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혹은 정말 병원에 갈 정도로 위독한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어 방문을 살짝 열어 보았다.
하지만 그가 쓰러져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어딜 간 걸까? 미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얼굴을 더 밖으로 내밀어 보았다.

「엄마야!」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손이 문을 확 잡아 열자 미례는 밖으로 몸이 꼬꾸라지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바닥에 얼굴을 박기 전에 그가 받아 안아 올려 방안으로 들어왔다.

「악! 내려놔!」

하지만 아무리 그녀가 버둥거려도 상무지구 출장 그는 그녀를 안은 채로 침대위로 올라갔다.

「악! 아파! 뭐 하는 짓이야?」

혹시 어제 밤 못한 일을 마저 하기 위해 자신을 침대로 데리고 온 것은 아닐까
가슴을 졸이던-절대 기대감은 아니얏!-미례는 엉덩이에 격렬한 아픔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이...바보 멍청이. 나쁜 놈. 미치광이 사신 놈아! 당장 날 놓아주지 못해!」

계속해서 자신의 엉덩이를 때리는 그의 손바닥을 피해 몸부림을 치며 미례는 펑펑 울기 시작했다.

「두고봐. 반드시 복수하고 말 거야.」

드디어 그의 손에서 풀려난 미례는 불이 붙은 듯이 화끈거리는 엉덩이를 매만지며 두 눈에 독기를 품고 그를 노려보았다.

「확 고자나 되 버려라!」

미례는 방에서 나가는 그의 등뒤에 대고 악담을 퍼부었지만 그가 다시 몸을 돌리자 움찔 놀랐다.
다행히 그는 그녀를 한번 노려보고는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미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향했다.
아마 내일이면 엉덩이가 원숭이 엉덩이처럼 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다음날 당번인 재웅은 아침을 준비하며 두 사람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다. 대장이나 누님이나 심기가
대단히 불편한 듯 식사도 건성이었으며 왠지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밤새 둘이 싸우기라도 했나? 재웅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사람과 좀 떨어져서 아침을 먹었다.

「누님 있잖아요.」

쥰이 출근하고 재웅을 도와 함께 집안 청소를 하고 있을 때 그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왜?」

밤새 분통이 터져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미례는 심통 사납게 물었다.

「그게 말이에요. 여자들은 말이에요...」

가뜩이나 엉덩이도 아프고 잠도 못 잔데다 사신인지 뭔지에게 어떻게 분풀이를 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인데
재웅이까지 말을 빙빙 돌리자 미례는 짜증이 났다.

「빨랑 용건만 말해.」

「저...그러니까 여자들은 어떤 남자를 좋아해요?」

미례가 화가 난 듯 재촉하자 재웅은 얼른 물어 보았다.

「무슨 소리야?」

설마 이 어린놈이 날 좋아한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미례는 섬뜩한 생각이 들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니까요, 여자들은 어떤 남자에게 호감을 갖느냐구요.」

재웅은 답답한 듯 물으며 손에 들고 있던 걸레를 내려놓았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묻는데? 너 혹시 좋아하는 사람 생겼냐?」

미례는 슬쩍 재웅을 떠보았다. 그런데 의외로 재웅이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었다.

「너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거야? 누군데?」

'제발 난 아니라고 해주라. 난 삐악삐악 병아리는 정말 싫어! 난 연하는 싫단 말야!'

「그...그게...」

'아이고 답답해. 그래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 무슨 죄가 있겠니. 그저 내가 조금 빼어난 미모를 가진 것이 죄라면 죄지.
에고 이 어린 것 가슴에 어찌 못을 박누.'

「비서실에요... 새로... 여직원이 왔는데요...」

'오잉? 이건 또 뭔 소리야?'

「저...이름은 한지연씬데요...올해 대학교를 졸업하고 입사했는데...스물셋이거든요...」

「잠깐! 그러니까. 회장님 비서로 여비서가 들어왔다는 그 말이야? 그 여비서에게 넌 한눈에 반한 거고?」

미례는 잠시 재웅의 말을 막으며 교통정리를 해보았다.

「네. 한지연씨는 정말 예뻐요.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온 줄 알았다니까요. 제 주먹보다 작은 새하얀 얼굴에 또 눈은 얼마나 큰데요.
새카만 긴 생 머리는 거의 허리까지 내려오더라구요. 키도 크고 굉장히 날씬해서 슈퍼모델 저리가라에요.」

한번 열린 재웅의 입은 거침없이 그 여비서에 대한 칭찬들을 쏟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리회장님 여비서 안 두시잖아? 예전에 어떤 여비서 때문에 크게 데인 뒤부터 절대 여비서 안 두시고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

「한지연씨가요 미모만 빼어난 게 아니에요, 누님. 머리도 굉장히 좋아서 이번에 수석입사했거든요.
그런데 회장비서실을 지원해서 회장님께서 어쩔 수 없이 발령내신거래요.」

「그래서 넌 지금 그 여비서에게 한눈에 반해서 어떻게 하면 마음에 들까 고민하는 중이고?」

미례는 지금 재웅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도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배신감을 느껴야 하는 건지
잠시 고민을 해보았다.

「네. 그런데... 한지연씨에게 관심을 보이는 직원이 한 두 명이 아니에요.
경호실 직원들은 물론이고 회사 내 모든 총각사원들이 수시로 비서실을 들락거리며 그녀에게 접근하려 하고 있어요.」

재웅은 풀이 죽어 중얼거렸다.

「전 직원들이 그 여비서에게 반해버렸단 말이야?」

미례는 그 여비서와 즐겁게 웃고 있는 쥰의 모습을 떠올리며 재웅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네. 거의 모든 직원들이 그럴걸요. 그런데... 그녀는 너무 차가워요.」

「차갑다니 무슨 소리야? 성격이 나쁜 거야?」

쥰이 그 여비서에게 관심을 가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조바심이 나는 미례였다.

「그렇지 않아요. 얼마나 착한데요. 문제는 너무나 예의바르고 깍듯이 대하는 거예요. 도무지 곁을 주지 않아요.」

「미인에다 마음씨까지 착한 단 말야?」

'거기다 머리까지 좋고? 세상에 그런 여자가 어디 있어?' 미례는 재웅이 그 여비서에게 반했기 때문에 좋게 말한다고 생각했다.

「네. 그런데....」

재웅은 머뭇거리며 망설였다.

「그런데, 뭘?」

「그녀에게 정혼자가 있다는 소문이 파다해요.」

「정혼자? 약혼했다는 뜻이야?」

임자 있는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재웅의 말에 미례는 마음속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약혼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정해준 결혼상대자가 있다는 말이 돌고 있어요.
굉장한 집안 남자라는데... 역시 한지연씨처럼 대단한 미인에게 애인이 없을 리 없겠죠?」

「실망하기에는 아직 일러, 재웅아.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재웅이 네가 어디가 어때서?
너처럼 착하고 바르며 성실한 남자도 없잖아. 기운 내. 이 누나가 널 적극적으로 밀어 줄게.」

미례는 풀이 죽어 있는 재웅의 등을 사정없이 치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한지연이라... 기회가 된다면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얼마나 아름답기에 재웅이 이렇게 전전긍긍하는 걸까?
설마 그놈의 사신마저도 그 여비서에게 넘어간 것은 아니겠지?

사신과의 동거 #6 (백설공주계모)

새로운 여비서가 들어오고 나서 갑자기 야근을 하겠다는 준호의 말에 황당함을 감추며
쥰은 자신의 아파트로 먼저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종관에게서 미례가 단식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서 꼼짝도 안 하세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으시고...어쩌죠, 대장?」

그가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종관이 달려나와 걱정스런 얼굴로 보고했다.

「너무 화 내지 마세요, 대장. 속이 많이 상하셔서 그러신 걸 거예요.」

잔뜩 굳은 표정으로 미례의 방으로 향하는 쥰을 종관이 걱정스럽게 따라왔다.

「알았어요, 대장. 저...잣죽 끓여 놓았으니 드시게 하세요.」

쥰이 우뚝 멈춰 서서 그를 노려보자 종관은 고개를 떨구며 돌아서서 아파트를 나갔다.
대장 성질에 부디 누님과 싸움이나 하지 말아야 할텐데 하는 걱정을 안고 종관은 자신의 숙소로 들어갔다.
미례의 방문 앞에 멈춰선 쥰은 잠시 호흡을 고르며 분노를 삭혔다. 그리고 손을 들어 가볍게 방문을 두드렸다.

「소용없어! 이 빌어먹을 집에서 나가게 해줄 때까지는 절대 아무것도 안 먹을 거야! 내가 굶어 죽은 다음에 우리 부모님하고
오빠들에게 너네 미치광이사신이 뭐라고 변명할지 귀신이 돼서라도 내가 꼭 지켜보고 말 거야!」

앙칼지게 터져 나오는 미례의 목소리를 들으며 쥰은 가슴을 거세게 들썩였다.

'뭐라고 하루종일 굶었다고?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저 사나운 목소리가 하루종일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믿어!
그리고 뭐라고? 빌어먹을 집에 미치광이 사신? 정말 이 망할 여자가!' 쥰은 당장이라도 방문을 박차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어두운 방안에 불을 켰다.

「제발 날 가만 놔두라니... 뭐야? 또 당신이야?」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지르던 미례는 그를 보자 시큰둥한 표정으로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거기 장승처럼 서 있지 말고 빨랑 나가요. 내 입 가지고 내가 안 먹겠다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에요?」

미례는 시트를 끌어올려 얼굴위로 뒤집어쓰며 웅얼거렸다.

「정말 왜 자꾸 귀찮게 하는 건데요?」

하지만 성큼 다가온 그는 시트를 젖히며 그녀를 무섭게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노려본다고 내가 먹을 줄 알아요? 여기서 내보내 줄 때까지는 물 한 모금 안 마실 테니 그렇게 알아요.」

미례 역시 지지 않고 그를 노려 보아주었다. 그리고 그가 등을 돌려 방에서 나가자 적이 안도했다.
흥! 별것도 아니면서 폼만 잡고 있어! 내가 이대로 질줄 알고? 어림없지!
미례는 결심에 결심을 다지며 침대에 누워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곧 그림자가 그녀 위에 드리우며 소리 없이 그가 돌아왔다. 어느새 그릇이 담긴 쟁반을 들고 말이다.

「아니 정말 귀머거리예요? 내가 안 먹겠다고 한말을 어디로 들은 거예요?」

침대 협탁 위에 쟁반을 내려놓은 그는 억지로 그녀를 침대에서 일으켜 앉혔다.
그리고 죽 그릇을 손에 들고 한 수저 떠서 그녀 입에 디미는 것이었다.

「진짜 미치겠네. 안 먹는다니까!」

미례는 그의 손을 탁 치며 소리를 버럭 질렀고 그 바람에 수저에 담겨 있던 죽이 그의 손등으로 흘렀다.

「죽 그릇 엎어 버리기 전에 당장 가지고 나가요!」

미례는 그가 자신의 손등에 묻은 죽을 핥는 것을 지켜보며 엄포를 놓았다.
순간 그의 두 눈이 살벌한 빛을 발하는 가 싶더니 갑자기 죽을 떠서 자신의 입에 집어넣는 것이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요. 그렇게 당신이나 먹는 것이...읍!」

먹이는 것을 포기한 그가 직접 먹으려 한다고 생각했던 미례는 기습적으로 그가 자신의 머리를 단단히 붙잡으며
입술을 밀어 부치자 당황하고 말았다. 그가 입안으로 밀어 넣어 주는 죽들을 얼떨결에 받아 목안으로 넘기며
미례는 몸 속에서 피어오르는 열기에 아찔해져왔다.

고집이 센 그녀의 기를 꺾기 위해 자신의 입을 통해 그녀의 입안으로 음식물을 집어넣던 쥰은
참을 수 없는 욕망을 느끼며 게걸스럽게 탐하듯 키스를 퍼부었다. 참을 수 없어. 가져버릴 거야.
이 말많고 그를 괴롭히는 조그만 마녀를 당장 가져버려야겠다고 쥰은 결심하며 손에든 그릇을 치우기 위해 잠시 몸을 떼었다.

「알, 알았어요. 먹으면 되잖아요! 먹으면 될 거 아니야!」

그의 입술에서 풀려나자 미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하마터면 욕망에 져서 일을 저지를 뻔했다.
어떻게 이런 실수를 또다시 반복할 수 있는 거지?

「이리 줘요. 그렇게 우악스럽게 먹이지 않아도 나 혼자 충분히 먹을 수 있어요.」

미례는 그의 손에서 그릇을 빼앗아 열심히 입에 떠 넣기 시작했다.
'뭐야? 난 이렇게 미칠 것처럼 원하고 있는데 이 여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는 거야?'
쥰은 열심히 죽을 떠먹고 있는 그녀를 노려보며 허탈감마저 느꼈다. 그녀의 손에서 그릇을 빼앗아 집어 던지고
그대로 덮쳐버리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는 그의 양손은 주먹 쥐어져 부르르 떨고 있었다.

「자요, 다 먹었으니 그만 노려보고 가지고 나가요.」

그릇을 깨끗하게 비운 미례는 그에게 척하니 내밀었다.

「어, 어? 왜 그래요? 다 먹었잖아요?」

미례는 그녀에게서 그릇을 받아 들 생각을 안하고 몸을 숙여 다가오는 그를 피해 뒤로 물러섰지만
침대머리판에 등이 닿아 갈곳이 없었다.

「설마 죽 먹은 거 다시 내 놓으란 뜻은...헉!」

쫑알대는 그녀의 입가를 그가 부드럽게 핥아내며 묻어 있던 죽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서서히 혀로 그림을 그리듯 그녀의 입가를 더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 미치광이 사신이 정말 미친 것 같았다. 미례는 오금이 저려오는 느낌에 옴짝달싹할 수가 없어
그가 희롱하는 대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가늘게 떨리는 몸을 느끼자 쥰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몸을 떼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서 떨어지기 일보직전인 그릇을 받아 쟁반에 담아 들고 조용히 문을 닫으며 방을 나왔다.

「야... 이... 진짜 미친놈아!」 하는 그녀의 악담을 들으며.







단식을 하루만에 포기한 미례는 다음날 그가 출근하고 없는 동안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넌더리가 나서 쫓아 보내게 만들까
열심히 궁리를 해보았다.

「재웅아.」

그녀는 달콤한 음성으로 재웅을 꼬셨다.

그리고...

쥰은 그 날 갑자기 비서실직원들과 회식을 결정한 준호에게 먼저 들어가겠다고 하고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절대로 그 작은 마녀가 보고 싶다거나 걱정되어서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아, 저 대장님. 그게 그러니까 말이죠...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온 집안에 탄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누님이 이것저것 만들어 보고 싶다고 하셔서...사오라는 재료를 사다 드렸거든요...처음에는 정말 괜찮은 것들만 만드셨는데...」

재웅은 성큼성큼 화난 듯 걸음을 옮겨 주방으로 향하는 쥰의 뒤를 따르며 설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상하게 이것저것 하시는 것마다 다 태우시는 거예요.」

재웅의 마지막 설명을 끝으로 쥰의 발은 주방입구에서 멈춰 섰다.
마치 원자폭탄이 그의 주방에 떨어진 것 같았다. 싱크대를 가득 메우고 있는 더럽혀진 각종 그릇들은
그의 집에서 동원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식탁 위에 실패작으로 널브러진 각종 음식들은-
이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모두 새카맸다. 일부러 태우기라도 한 듯.
아마 각종 냄비와 후라이팬들이 일센티는 넘게 눌러붙어 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그의 가스오븐레인지. 정말 처참했다. 본래의 메탈한 은빛색채를 잃어버리고 검은 때-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에 뒤집혀 과연 온전한 기능을 발휘할지 걱정이 되었다. 또한 활짝 열려진 전자레인지 또한 탄 음식 잔해를 뒤집어쓰고
신음하고 있었다.

「어머, 오셨어요?」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작은 마녀는 활짝 열린 냉장고-안에 아무것도 없었다.
한달 식료품들이 작은 마녀의 손에 모조리 날아간 듯 싶었다.-
앞에서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보시다 시피 음식을 좀 만들다가 약간 태웠어요. 시장하시죠? 이것 좀 드셔볼래요? 탕수육이에요」

새카맣게 탄 뭔가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하는 여자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쥰은 뒤돌아 주방을 나왔다.
그의 등뒤에서 덜덜 떨며 있던 재웅은 얼른 비켜서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쥰은 딱 한마디, 아니 눈짓을 했다. '깨끗이 치워.'

그리고 재웅은 밤새 울면서 주방 청소를 했다는 전설이 흘러 전해 내려왔는데...
우리의 누님 신미례는 침대에서 편안하게 팔다리를 펼치고 단잠을 주무셨다나 어쨌다나...
침묵의 사신은 어떻게 됐냐구? 그야 너무 화가 나서 밤새 분노로 떨었다지 아마?

주방을 초토화시키는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음날 미례는 없는 부지런을 떨며 갑자기 빨래를 하겠다고 난리를 쳤다.

「저...미례씨...이거 정말 세탁기로 돌려도 되는 거 맞아요?」

그리고 다음날 당번이었던 진규는 재웅에게 전해들은 말이 있어 몸을 사리며 그녀가 하는 일들을 근심스럽게 지켜보았다.

「물론이지요.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진규씨는 뜨개질이나 하고 있어요. 갇혀 있었더니 심심해서 운동 좀 하려는 거예요.」

세탁기를 돌리는 것도 운동에 들어가는 거냐고 물으려던 진규는 슬픈 빛을 띄우는 미례의 두 눈을 보자
마음이 약해져 거실 쇼파에 자리를 잡고 뜨개질에 몰두하며 그녀가 하는 일에서 완전히 관심을 끊었다.

「다녀오셨어요, 대장? 오늘은 정말 조용히 지냈어요.」

그 날 퇴근한 쥰을 맞아 진규는 활짝 웃으며 보고했다.
재웅의 말 때문에 걱정했던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미례는 정말 아무런 사고를 치지 않고 조용히 지냈다.
아니 조용히 세탁기만 돌리는 것 같았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진규는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쥰의 등뒤에 얼른 인사를 하고 자신의 아파트로, 앞집으로 갔다.

방으로 들어간 쥰은 미례가 이상할 만큼 조용하고 자신의 방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의아했지만
집안이 깨끗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옷을 벗었다.
그리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한 후 타월만 허리에 두르고 방으로 돌아와 옷장 문을 열었다. 그런데...
순간 쥰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모든 옷장 안이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닌가.
팬티는커녕 양말 한 짝 없었고 양복에 와이셔츠까지 그의 옷들이 몽땅 사라져 버렸다.
쥰은 마치 새로 들여놓은 가구처럼 텅 비어 있는 옷장을 멍하니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고 미례의 방으로 쳐들어갔다.

「뭐예요? 이젠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오는 거예요?」

침대 위에서 배를 깔고 누워 다리를 흔들며 잡지를 읽던 미례는 들이닥친 쥰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아니 속으로는 벌거벗은-아래를 수건으로 감싸고 있기는 했지만.-그를 보고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있었다.

「나보고 뭘 달라는 거예요?」

무시무시한 얼굴로 다가와 그녀에게 손을 펴서 내미는 그를 올려다보며 코끝을 찡그렸다.

「설마 이 잡지가 탐나는 거였어요?」

미례는 자신이 보고 있던 잡지를 그의 손에 올려주었다.
하지만 그는 가차없이 바닥으로 집어 던져 버리고 그녀를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정말 왜 이러는 거예요?」

미례는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는 듯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자 그가 몸을 돌려 그녀의 옷장으로 다가가 열어 젖혔다.
옷장 문마다 모두 열어젖히고 그가 뭔가를 찾았지만 미례는 숨죽여 웃으며 모른 척 했다.

「뭘 찾는 건데요? 아, 당신 옷을 찾는 건가요? 그거라면 내가 다 빨았는데. 아마 건조대에 있을 거예요.
다 못 빤 것은 세탁실에 있구요.」

미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에게 말해 주었다.
뒤돌아 그녀를 죽일 듯이 바라보던 그가 방문을 거칠게 열고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쥰은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고급양복들이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건조대에 널려있는 모습과
한쪽에 뭉쳐져 있는 속옷과 와이셔츠들. 세탁실은 더 끔찍했다.
아예 물에 절여졌다는 표현이 딱 맞을 것이다. 더 이상은 못 참아! 오늘은 기필코 마녀 사냥을 하고 말테다!

「어? 왜 그래요? 난 그저 놀고 먹는 게 미안해서 빨래를 해줬을 뿐이데.」

미례는 다시 그녀의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그가 부술 듯 닫으며 다가오자 항의하듯 말했다.

「그러게 날 그냥 내보내 달라고 했잖아요. 내가 여기 있으면 당신 집이 어떻게 될지 난 책임 못 져요.」

미례는 점점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에게 밀려 침대까지 왔다.

'그러니까 여기서 나가기 위해 내 집과 옷들을 엉망으로 만들어놨단 말이지 이 작은 마녀!'
쥰은 이를 갈며 그녀의 양팔을 붙잡아 침대위로 넘어뜨렸다.

「악! 왜 이래요?」

미례는 침대에 널브러진 자신의 위로 그가 올라오자 비명을 지르며 몸을 굴려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그가 재빨리 그녀의 다리를 잡아 끌어당겨 제자리로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이것 놔! 이 나쁜 놈!」

미례는 자신의 발목을 붙잡은 그의 손0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발길질을 했지만 소용없었다.
어느새 그녀는 침대에 바르게 누워 그의 밑에 깔려있었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의 손이 그녀의 셔츠단추를 풀기 시작하자 미례는 미친 듯이 몸부림치며 그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에서 뜯기듯 벗겨진 셔츠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고 이어 그의 손이 청바지로 향했다. 지퍼를 내리고 몸부림치는
그녀의 엉덩이를 한 손으로 우악스럽게 붙잡고 다른 손으로 가쁜 하게 벗겨낸 그는
얼마 되지 않아 그녀를 반라로 만들어 놓고 만족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이 변태자식! 날 어쩌려는 거야?」

그의 커다란 손이 브래지어를 잡아뜯듯 벗겨내 가슴을 드러나게 하자 미례는 양팔로 몸을 감싸며 악을 썼다.

「혹시 날 강간할 생각이라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게 좋을걸. 내가 가만있을 줄 알아?
그리고 당신 부하들이 이런 당신의 행동을 알면 어떻게 행동할까?」

미례는 그의 행동을 멈추게 하기 위해 정신 없이 입을 놀렸다. 하지만 곧 거친 숨을 들이마시며 온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양 손목을 붙잡아 머리위로 누른 그가 그녀의 가슴을 입에 넣고 빨기 시작했던 것이다.
온몸으로 퍼지는 쾌감에 미례는 눈을 꼭 감고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이건 말도 안돼! 정신차려 신미례! 여기서 이 미친놈한테 당할 순 없어.
하지만 그의 입과 혀가 그녀의 가슴을 희롱하다 점점 아래로 내려가자 머릿속에 뿌연 안개가 끼인 듯
더 이상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팬티위로 그녀의 여성을 적시듯 애무하는 혀의 놀림에 미례는 풀려난 팔로 그의 어깨를 붙잡고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이윽고 그녀의 욕망을 자신 안에 담기라도 하듯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와 닿으며 한 입에 삼켰다.
자신의 입안을 거침없이 돌아다니며 당당히 소유를 주장하듯 애무하는 그의 혀에게 미례는 무기력하게 스스로를 내주고 있었다.

따르릉~따르릉~ 어디선가 자지러지는 벨소리가 울려왔지만
미례는 느끼지 못하고 그저 그의 목에 매달려 그가 주는 쾌락에 빠져 있었다.
이대로 그녀 안에 자신을 묻을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그녀를 갖지 못한다면 아마 죽을 지도 몰랐다.
그만큼 그녀를 향한 그의 욕망은 스스로 제어할 수 없을 만큼 강한 것이었다. 하지만...그의 직업은...
그의 본성은 울리고 있는 전화벨을 정확히 감지했으며 받아야 한다고 그에게 경고했다.
그래서 쥰은 그녀에게서 억지로 몸을 떼고 일어났다.
마치 팔다리를 잘라내는 상실감을 느끼며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온 쥰은 몸에서 벗겨져 나간 타월을 무시하고
나체로 거실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쥰이냐?」

간단히 물어오는 음성은 바로 노회장님이셨다.

「はい.」

쥰은 간단히 대답했다.

「지금 나 좀 보자.」

쥰의 성격을 잘 알고있는 노회장은 간단히 용건만 말했다.

「すぐ行きます. (곧 가겠습니다.)」

쥰은 수화기를 내려놓다 방에서 나와 그를 노려보고 있는 미례를 발견했다.

「あなた日本語はしますね. (당신 일본말은 하는군요.)」

미례는 그를 향해 일본어로 말했다.
그가 어쩌면 말을 하지 않는 것은 한국말에 서툴기 때문에 스스로의 약점을 들어내기 싫어서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등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벗어 놓았던 옷들을 다시 입고 나와 현관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どこを行こうとするんですか? (어딜 가려는 거죠?)」

미례는 자신 역시 셔츠 하나만 간신히 걸치고 나온 것을 의식하지 못하며 그를 따라 나섰다.

「誰に?いに行く? (누구를 만나러 가는 거예요?)」

미례는 구두를 신으려는 그를 막아서며 소리질렀다.
왠지 그에게 전화를 건 사람이 여자일 것 만 같이 느껴져 미례는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電話した人が誰ですか? (전화한 사람이 누구죠?)」

하지만 그는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 보다 밀치고 나가버렸다. 뒤이어 그의 모습을 감추며 문이 굳게 닫혀버렸다.
미례는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며 자신이 그에게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신미례를 보호할 것.> 쥰은 진규에게 문자를 날리고 나서 이어 자신의 옷들을 다시 준비할 것을 지시했다.
문득 상처 입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미례의 모습이 떠오르자 가슴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콕콕 쑤셔왔다.
노회장의 부름만 아니었으면 절대로 그녀를 그냥 놔두고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뜻밖이었다.
그녀가 일본어를 할 줄 알다니... 물론 수다만 떠는 머리가 텅빈 여자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쉬고 있는데 내가 널 방해 한 건 아니냐?」



병실로 들어서자 노회장이 반갑게 웃으며 그를 맞았다.

「아닙니다, 회장님. 무슨 급한 일이라도?」

쥰은 침대 옆 간병인이 앉아 있던 의자에 앉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급한 일은 무슨. 그저 늙다보니 잠이 안 오는 구나. 그래서 쓸데없이 이것저것 걱정이 되어서 말이다.」

「회장님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그러시는군요.」

쥰은 노회장의 손을 잡아 주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그놈만 생각하면 내가 마음이 아프구나. 워낙 상처가 많은 놈이라서 말이다. 그래서 항상 네게 고마워하고 있단다, 쥰아.」

그는 쥰의 손을 마주잡아 힘을 주며 말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회장님.」

「네가 가족들과 떨어져 한국에서 생활한지도 벌써 이십 년이 되었구나.
그때 네가 준호 곁에 있어 주기로 결심해 줘서 정말 고마웠단다.」

「한번도 그때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회장님은 목숨과도 같으니까요.」

「그래. 네 마음 다 안다 쥰아. 그래서 네게 고마운 거야. 내가 죽는다 해도 네가 준호 곁에 있어줄 테니까.」

그의 말에는 쥰에 대한 강한 믿음이 깃들어 있었다.

「그저 작은 바램이라면 그놈이 나주출장안마 내가 죽기 전에 결혼하는 모습을 보는 건데... 통 관심이 없으니...」

노회장은 눈시울을 붉히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혹시 요즘 마음에 두고 사귀고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던?」

「글쎄요...」

쥰은 노회장의 은근한 질문에 잠시 새로 비서실로 들어온 한지연을 떠올려 보았다.
그녀를 향한 준호의 관심이 남달랐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래,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야. 다시 연이를 만나 연이와 함께 할 수만 있다면 결혼이라도 할 수 있어.

얼마 전 준호와 대화를 나누었을 때를 회상하며 쥰은 잠시 머뭇거렸다.

-연이야...왜 오지 않는 거니? 왜 날 찾아오지 않는 거야? 날 잊어버린 거니? 그런 거야?

그리고 바로 어제 밤. 회장의 운전기사인 김기사의 연락을 받고 한밤중에 달려간 클럽에서
술에 취한 준호를 택시에 태워 돌아오는 길에 들었던 그의 말 또한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아직까지 연이라는 소녀에게 집착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뭐? 아직도 십 년 전 그 여자아이를 생각하고 있단 말이냐?」

노회장은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네. 그 연이라는 소녀와 만나면 결혼하겠다고 말씀하셨을 정도니까요.」

「그래, 그렇게 말했단 말이지...연이라...」

노회장은 깊은 생각에 잠겨 눈을 감았다.

쥰은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앞으로 감당해야할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도대체 자신을 자극하는 그 작은 마녀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아직도 자신의 몸은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이 끊임없는 갈망은 아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될 것이다.

사신과의 동거 #5

일주일하고도 하루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 미례는 상쾌한(?) 새벽공기를 들이마시다 얼굴을 찌푸렸다. '으웩! 매연이잖아. 퉤퉤.'

「누님. 창가에서 얼굴 떼세요. 위험합니다.」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미례를 말리며 재웅이 얼른 창문을 올렸다.

「그나저나 어제 대장하고 지내시는데 별일은 없으셨어요?」

「응? 으~응. 그저 그냥 지냈지 뭐.」

미례는 재웅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돌렸다. 어제 하루종일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그를 졸졸 따라다녔던 미례는 저녁 무렵에는
피곤함을 느끼고 지쳐서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혼자 떠들어야하는 어려움이 있기는 했지만 생각만큼 그와 보내는 시간들이 나쁘지는 않았다. 문득 조용히 있다 시선을 들 때면
그와 눈이 마주쳤고 그때 느끼는 이상한 감정들에 가슴이 설레던 것만 빼면 비교적 평온한 하루였다.

「이쪽으로 오세요, 누님.」

재웅은 한영그룹본사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 그녀를 데리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어디 가는 거야?」

재웅이 38층 버튼을 누르자 미례는 물어보았다. 이른 새벽부터 침묵의 사신인지는 일찌감치 집을 나가 버렸고
그녀 역시 일곱시가 채 되기도 전에 재웅의 손에 이끌려 이곳으로 온 것이다.

「곧 회장님을 만나게 될 거예요.」

「뭐 회장님? 그걸 이제 말해주면 어떻게 해? 이걸 어째! 화장도 못하고 나왔는데. 난 몰라!」

미례는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했다. 어차피 갇혀 지내며 주는 대로 먹고 입는 처지인지라 별 투정을 부리지는 않았지만
맨 얼굴로 그룹총수를 볼 생각을 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누님이 뭐가 어때서요? 예쁘시기만 한데요, 뭘.」

재웅은 그녀가 유난을 떠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어제 진규형님이 그녀를 위해 사다준 정장과 구두 차림의 미례는
그동안 집안에서 편안한 옷차림만 봐왔기 때문인지 그의 눈에는 예쁘게만 보였다.

「옷만 제대로 입으면 뭘 해? 얼굴에 화장을 못했잖아!」



어쩐지 옷을 쫙 빼 입힐 때 의심을 했어야 했는데.

「화장 안 해도 예뻐요, 누님. 정 마음에 걸리시면 나중에 화장품 사다 드릴게요.」

재웅은 미례를 안심시키며 빙긋 웃어주었다. 정말 여자들이란.

「나중에 언제? 회장님하고 만나고 난 뒤에 사다주면 뭐해? 화장 곱게 해서 누구에게 잘 보이라고?」

「혹시 알아요. 우리 대장이 누님에게 반할지.」

「뭐? 뭐가 어쩌고 어째? 야, 말만 들어도 끔찍하다. 두 번 다시 그런 말 하지마! 알았어?」

미례가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그를 다그쳤기에 재웅은 꼼짝도 못하고 고개만 간신히 끄덕였다.

「그런데 왜 회장님이 날 보자고 하시는 건데?」

사신인지 뭔지에게 날 맡겨두고 관심도 보이지 않을 때는 언제고, 흥! 이제야 나에게 고맙다고 인사라도 하려는 모양이지?
미례는 속으로 쫑알거리며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재웅을 따라 내렸다.

「어서 오십시오, 신미례씨.」

비서실로 들어서자 재웅 만큼이나 덩치가 큰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와 친절히 맞아 주었다.

「비서실장 이민석입니다.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지요?」

자신을 비서실장이라고 소개한 이민석은 그녀와 같은 나이에 외모도 비교적 준수한 남자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미례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얌전히 인사를 했다. 일면 대외 접대용 행동이라고나 할까.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민석은 회장실 문을 노크한 후 미례만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신미례씨 오셨습니다.」

「어서 오세요, 신미례씨.」

비서실장의 말에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젊은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걸어오며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회장님.」

미례는 넋을 놓고 회장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세상에, 정말 기가 막히게 잘생겼잖아?
가끔 신문이나 잡지 혹은 먼발치에서 그를 볼 기회가 있었지만 정면으로 얼굴을 대하기는 처음이었다.

「앉으세요, 신미례씨.」

회장의 권유에 쇼파에 앉으며 미례는 그제서야 쥰이 회장의 뒤쪽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뭐가 또 못마땅한지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저놈의 인상만 안 쓰면 회장 못지 않게 잘생긴 인물이구만,
왜 저렇게 얼굴을 구기고 있는 거야? 미례는 쥰을 흘낏 쳐다보다 다시 눈앞에 앉는 회장에게 관심을 집중시켰다.
드디어 회장을 만났으니 그동안 저놈의 사신이 한 짓을 모두 일러바치는 거야.

「진작 신미례씨에게 감사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경황이 없어서 인사가 늦었습니다.」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회장은 그윽한 목소리만큼이나 말솜씨도 좋았다. 더불어 살짝 짓는 미소가 백만불짜리였다.
쩝! 완전히 그림의 떡이구만.

「뭐 이제라도 하셨으니 괜찮아요.」

헉! 못살아. 여기서 진심을 말하면 어쩌자는 거야, 신미례! 내가 정말 너 땜에 못살아.
미례는 자신의 입을 쥐어박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제발 입 좀 다물고 있어.

「위트가 넘치는 분이시군요. 하하하」

다행히 회장은 미례가 농담을 했다고 생각하며 웃어 넘겨주었다.

「아직 설명을 듣지 못하셨겠지만 조금후면 한영그룹 임원진과 계열사 사장들이 모두 모일 겁니다.
지금 37층 회의실에 딸린 소 회의실 안에는 검찰에서 나온 사람들이 대기중이고요.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윤준호회장은 조심스런 표정으로 미례를 바라보았다.

「네. 결국 조세현사장을 잡으실 거라는 말씀이잖아요.」

그리고 나의 이 감옥 같은 생활도 끝이라는 말이고. 야호! 신난다!

「맞습니다. 그 자리에 신미례씨를 동석시킬 생각입니다. 괜찮으시겠어요?」

「물론이지요. 그 나쁜 놈을 잡는 자리에 제가 빠진다는 것은 말이 안되죠. 그런데 한가지 뭘 물어 봐도 될까요?」

회장에게 확답을 받아 놔야해. 나중에 딴소리 나오지 않게. 암! 세상에 믿을 놈, 아니 사람 하나도 없으니까.

「어려워 말고 말씀하세요.」

윤준호회장은 그녀에게 부드럽게 웃으며 질문을 재촉했다. 그렇게 선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면 속물인 내 자신이 미안해지잖아.

「혹시나 해서 여쭙는 건데요. 저 그러니까. 제가 말이에요...설마 짤린 건가요?」

하지만 미적거리는 것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았으므로 미례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윤준호회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아니 그룹 총수씩이나 되는 사람이 그렇게 말귀가 어두워서 어쩌누...쯧!

「그러니까 제가 실직 당한거냐구요. 한종금사장비서라는 자리에서 떨려져 나간 건지 묻는 거예요.」

「하하하. 정말 재미있으신 분이군요.」

윤준호회장은 정말 유쾌한 듯 가슴속에서 우러난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남은 밥줄이 걸린 일인데 농담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지.
내가 지금 포상금 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니잖아. 정당한 내 권리를 주장할 뿐이라구.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 조세현 사건만 무사히 해결되고, 신미례씨 안전이 확실해지면 다시 일하실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정말이지요?」

미례는 미심쩍은 얼굴로 시원스레 대답하는 회장에게 물었다.

「물론입니다. 이번에 받으신 피해보상까지 모두 해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우리 오빠에게 새로 사준 차를 혹시 제 퇴직금에서 제한다거나 그러지는 않는다는 뜻인가요?」

미례는 내침 김에 확답을 받아 두기로 마음먹었다.

「네? 새차라니요?」

윤준호회장은 의아한 듯한 시선을 창가 쪽에 조용히 서있는 쥰에게 던졌다.
쥰이 고개를 젖는 모습을 본 그는 다시 미례에게 시선을 돌렸다.

「차뿐이 아니라, 신미례씨 오피스텔의 파손된 곳와 물건들까지 완벽하게 새로 해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뭐가 파손되었다구요?」

미례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벌떡 일어났다.

「아, 진정하세요. 벌써 수리 들어가서 이번 주 안으로 완벽하게 고쳐드릴 겁니다. 물건들도 모두 새로 들여놓을 거구요.」

회장이 당황하며 그녀를 달래었지만 벌써 자리에서 일어난 미례는 냉큼 쥰의 코앞에 다가서 있었다.

「지금 내가 들은 말이 전부 무슨 소리예요? 이봐요, 잘난 벙어리 사신 양반.
내 집이 어떻게 되었다는 건지 그 입으로 한번 설명 좀 해보시죠?」

미례는 팔짱을 끼고 턱을 치켜올리며 그에게 도전적으로 물었다.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무심한 그의 시선과 분노로 이글거리는 그녀의 시선이 파지직 불꽃을 일으키며 부딪혔다.
두 사람만 특별한 공간에 갇힌 듯한 이상한 기류가 흐르는 가운데 한치의 양보도 없는 눈싸움이 벌어졌다.

「아, 벌써 시간이 되었군요. 그만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쥰?」

윤준호회장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 짐짓 자신의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두 사람의 긴장감을 깨뜨려주었다.
지금 두 사람의 싸움을 구경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아쉽지만 쥰이 어떻게 행동할지 지켜보는 일은 포기했다.

「좋아요, 벙어리 사신님. 나중에 이야기하죠. 아니지. 어차피 잠시 후에 조세현사장이 잡혀가면
당신이랑은 영영 빠이 빠이니 이야기 할 것도 없겠군요. 그동안 눈물나게 고마웠어요. 날 감금시켜두고 지켜줘서.
뭐 이것도 나중에 늙어서 추억거리가 되긴 하겠지만요.
어쨌든. 내 집을 최대한 빨리 원상복귀 시켜 놓는 게 당신 신상에 이로울 거예요.」

미례는 그의 손에 이끌려 한층 아래 인 37층 회의실로 이동하며 장황한 연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몇 십분 후 눈앞에서 조세현이 잡혀가는 것을 지켜보며 미례는 속이 후련해졌다.
그의 비리를 알게된 목요일부터 그가 잡혀가는 오늘까지
십여일에 걸쳐 겪어야 했던 고생들이 모두 깨끗이 씻겨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이제 다시 평범한 일상들로 돌아갈 생각으로
그녀는 가슴이 벅차오는 감동을 느꼈다. 그동안 지겹기만 했던 그녀의 삶이 얼마나 평온한 것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는 사건이었다.

다시 혼자만의 독신생활로 돌아갈 꿈에 부풀어 있던 미례는
재웅의 손에 이끌려 쥰의 아파트로 돌아 올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소리야? 여기서 나갈 수 없다니?」

자신의 물건들을 챙겨서 나가려는 그녀를 재웅이 막아섰다.

「대장님 명령이었습니다.」

그녀가 알던 어리버리 재웅이 아니었다. 절대로 그녀를 나갈 수 없게 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긴 재웅의 눈빛을 보며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농담이지? 지금 나 데리고 장난치는 거지? 조세현도 잡혀간 마당에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는데? 재웅아 이러지마.
이런 장난 하나도 재미없어. 아까 너도 봤잖아.」

미례는 억지로 웃으며 재웅을 달래었다.

「죄송합니다, 누님. 저도 어쩔 수 없어요. 광주출장안마 아시잖아요. 대장 명령 어기면 전 죽어요.
아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실 거라고요. 그럼 쉬세요.」

재웅은 그녀를 방에 집어넣고 첫날과 마찬가지로 문을 잠가 버렸다.

「야, 이 나쁜 놈아! 당장 문 열어! 무슨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어? 내가 왜 또 갇혀야 하는데? 이 나쁜 놈들아...엉엉」

미례는 문 앞에 매달려 두드리며 소리내어 울었다. 차라리 꿈이라도 꾸지 않았다면 나았을걸.
돌아갈 거라는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었는데.

「내가 뭘 잘못한 건데? 난 조세현에 대해서 알려준 일밖에 없잖아! 차라리 조세현 놈과 타협을 볼걸 그랬어! 엉엉」

미례는 분하고 원통해서 하루종일 울었다.







쥰은 자신의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오셨습니까?」

그의 직속 부하들이 아닌 경호실 소속 직원 두 명이 쇼파에서 일어나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쥰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짓으로 나가라고 명령했다. 신미례를 다시 가두는 일을 직속 부하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불러들인 경호실 직원 두 명은 조용히 그의 집을 나갔다.

「언제까지 이곳에 가둬둘 작정이에요?」

그가 냉장고의 디스펜서에 컵을 대고 얼음과 물을 따를 때 미례가 주방으로 들어와 앙칼지게 물었다.
그녀를 가둬두라는 자신의 명령을 어긴 재웅을 따끔하게 혼내줄 필요가 있었다. 요즘 들어 부쩍 말을 듣지 않고 미례를 감싸고도는
부하들의 군기를 단단히 잡을 생각이었다.

「당장 날 내보내주지 않으면 나도 더 이상은 못 참아요.」

그가 그녀를 무시하며 묵묵히 물을 마신 후 컵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거실로 나가버리자 미례는 화를 내며 뒤따랐다.

「조세현도 구속되었는데 왜 날 가둬두는 거냐고요!」

또다시 자신의 방으로 숨어들려는 쥰의 앞을 가로막으며 미례는 분노를 폭발시켰다. 쥰의 직속 부하들과는 달리 경호실
직원들은 하루종일 그녀를 무시하며 대꾸조차 하지 않았기에 미례의 신경은 한껏 날카로워져 있었다.

「날 내보내 달란 말이야, 이 나쁜 자식아!」

미례는 주먹을 쥐고 그의 가슴을 사정없이 치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갇혀 있던 분노와 울분, 그리고 무력감에서 오는 두려움을 모두
주먹에 담아 그에게 퍼부어 댔다.

「도대체 왜 날 가둬두는 거야. 이 나쁜 놈...엉엉...」

묵묵히 서서 그녀가 때리는 대로 맞아 주는 그보다 먼저 지쳐버린 미례는 미끄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난 더 이상 갇혀 있는 거 싫어. 나가고 싶다고. 내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싶단 말야.」

미례는 계속해서 울부짖으며 가슴속에 있는 말들을 끄집어냈다.

「혼자 지껄여 대는 것도 이젠 정말 지겨워. 할 일없이 집에서 빈둥거리는 것도 싫단 말야.
당신이야 입에서 곰팡이가 필 정도로 말을 안 하는 게 좋을지 모르겠지만 난 싫어!」

무릎을 모아 얼굴을 묻고 울던 미례는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손길에 움찔 놀랐다.

「뭐예요? 내보내 주겠다는 뜻이에요?」

미례는 얼굴을 들어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그를 노려보았다.

「누가 눈물 닦아 달래요? 내보내 달라고 했지. 당신이 날 가둬 두지만 않으면 내가 울 일이 뭐가 있어요?」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럽게 그녀의 볼을 닦아주는 그의 손을 야멸 차게 치우며 쏘아 부쳤다.

「내일은 날 집에 보내 줄 거죠?」

그의 부드러운 행동에 희망을 가진 미례는 눈물을 그치고 물었다.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왜요? 왜 안 된다는 거예요? 오늘 아침에 검찰에서 조세현을 잡아가는 거 당신도 똑똑히 봤잖아요?
그는 더 이상 날 해칠 수 없다구요. 난 내 집에 가고 싶어요!」

하지만 그는 그녀를 향해 다시 한번 고개를 저으며 안 된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도대체 이유가 뭐야? 말 좀 해봐! 답답하게 고개만 젓지 말고 말 좀 해보란 말야.」

악을 쓰는 그녀의 목이 잔뜩 쉬어 있었다. 하루종일 울었던 터에 그와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 나니 미례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 일어설 기운도 없었다.

「만지지마!」

그래도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을 뿌리칠 기운은 남아 있었다. 누가 이런 동정해 달라고 했나.
가둬두고 사람 피를 말리는 나쁜 인간 주제에 왜 위하는 척 하는 거야!

「갈 거야. 더 이상 이런 곳에 내가 있을 줄 알고!」

분노가 그녀에게 힘을 불어 넣어주었고 미례는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벌써 몇 번이나 시도해 봤기 때문에 가망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례는 문을 열기 위해 미친 듯이 손잡이를 돌렸다.
하지만 망할 놈의 사신이라는 남자는 자신의 집을 무슨 요새처럼 만들어 놔서 그녀의 힘으로는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미례는 좌절감에 문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빼며 바닥으로 미끄러지듯 주저앉아 격한 울음을 터트렸다.

「뭐 하는 짓이야? 안 내려나? 야! 당장 내려놔!」

어느새 다가와 그녀를 안아 올린 그는 가뿐히 걸음을 옮겨 미례가 묵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녀의 발버둥에도 끄덕도 하지 않고 침대 위에 내려놓은 그는 욕실로 들어가 물수건을 만들어 나왔다.

「정말 미치겠네. 왜 나이팅게일 흉내를 내는 건데?」

눈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주는 그의 행동에 당황하고 말았다.

「이런다고 내가 당신을 용서할 줄 알아? 내일 당장 경찰에 신고할거야.」

미례는 부드러운 그의 시선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계속해서 쇠된 소리를 질렀다.

「날 어쩌려는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 잘못 봤어, 사신씨.」

그는 그녀의 협박을 무시하며 얼굴을 닦아주는 일이 끝나자 시트를 끌어 올려 덮어주고 일어섰다.
나가기 전 뒤돌아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그는 전등스위치를 꺼주고 조용히 방문을 닫으며 나가버렸다.

「도대체 이유가 뭐냐고! 왜 날 가둬두는 건데? 날 어쩌려는 거야?」

어두운 방안에 그녀의 질문이 부딪혀 되돌아 왔다.







「당신을 어쩌면 좋을까?」

울음소리가 잦아지기를 기다렸던 쥰은 잠이든 그녀의 방을 찾아왔다.
깊은 잠에 빠져 오르락 내리는 그녀의 가슴을 지켜보던 그는 거친 호흡을 삼키며 시선을 돌렸다.

「왜 당신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는 거지?」

마치 잠이든 그녀에게 대답을 바라듯 쥰은 한참동안 미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땀에 젖은 곱슬거리는 붉은 머리를 치워주던 그의 손이 의지를 배반하고 매끄러운 볼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녀의 볼을 걸쳐 입술에 머무른 그의 손이 욕망으로 가늘게 떨렸다. 가지고 싶었다. 이 작고 수다스런,
정말 그를 미치게 만드는 이 여자를 품에 안고 싶다는 욕망이 그의 안에 자리 잡고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에게 목매던 수많은 미인들에게도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그였다. 그저 생리적인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그녀들을 이용해 왔던 그가 생전 처음으로 흔들리는 여자가 바로 신미례 그녀였다. 언제부터였는지는 그도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녀에게 기습 키스를 받았던 그때부터인지도,
아니면 그 골목길에서 당당하게 그를 대하던 그녀에게 끌리기 시작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당신에게 난 절대로 어울리는 상대가 아니야.' 쥰은 입밖에 내어 말하지 못하고 가슴으로만 속삭였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에서 손을 떼며 주먹을 쥐었다. 마치 그의 마음을 그 안에 가둬 두려는 듯.

「상처가 많은 당신을 위해 좋은 남자가 나타나겠지. 나 같은 놈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

쥰은 슬픈 눈길로 미례를 내려보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방을 나갔다.







푹 자고 일어난 미례는 어제 밤만큼 절망스럽지만은 않았다. 밝은 아침이 되자 쥰이라는 남자가 그녀를 가둬둘 권리가 없으니
곧 나갈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렇게 마냥 갇혀서 연락이 되지 않으면
그녀의 오빠들이나 부모님이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실종신고를 내실수도 있었고 그렇게 되면 그녀는 풀려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설마 그렇게 되기까지 몇 달 걸리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야 쥰의 직속 부하들이 그녀를 도와줄 수도 있었다. 미치광이 사신-어젯밤이후로 그렇게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의 횡포를 어쩌면 윤준호회장에게 말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최소한 회장은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였으니까.
하지만...유유상종이라고 똑같은 사람이면 어쩌지... 미례의 마음은 희망과 절망 속을 헤매고 있었다.

「이제 일어나셨어요, 누님?」

아침을 준비하던 종관이 그녀에게 활짝 웃어주는 것을 보며 미례는 마음이 놓였다.

「곧 식사준비가 끝날 거예요. 국만 끓으면 되니까 앉아서 기다리세요. 우유라도 한잔 드려요?」

「미치광이 사신이 오늘부터는 있어도 된데?」

미례는 식탁에서 의자를 빼내 앉으며 신랄한 어조로 물었다.

「미치광이 사신? 아, 우리 대장말이군요. 오늘부터 우리 네 명이 돌아가며 당번서기로 허락 받았어요.
어차피 이곳에 계실 거면 저희들이 누님을 모시고 싶어서요.」

종관은 능숙한 솜씨로 식탁을 차리며 설명해 주었다.

「날 모셔 달라고 부탁한 적 없으니 내보내 주기만 하라구.」

그녀가 무슨 조폭 두목도 아닌데 애들을 밑에 거느리고 뭘 하란 말인가? 이참에 전국구를 평정해 버려?

「저희들도 밤새 생각해 봤는데요. 역시 대장말씀이 옳은 것 같아요.」

「무슨 헛소리야?」

미치광이 사신 밑에 있더니 얘들까지 물들었나?

「조세현 보다는 그 공범자가 더 무서운 놈일 수도 있어요,
누님. 그러니 혹시라도 누님 혼자 집으로 돌려보냈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요?
역시 대장 말씀대로 이곳에 계시는 게 안전할 것 같다고 저희들도 의견일치를 봤어요.」

자못 진지한 폼이 그녀의 말이 먹혀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니까...말인 즉...조세현 공범자가 잡힐 때까지 여기 있어야 한다는 뜻이야?」

미례는 비명을 '빽' 지르고 말았다. 일주일이 조금 넘게 갇혀 있는 것도 간신히 참았는데
조세현의 공범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에 그놈이 잡히기만 기다려야 한다는 이 말이야 지금?

「네. 처음에는 누님이 워낙 집에 가시고 싶어하시니 저희들이 교대로 같이 가서 있을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누님 오피스텔이 너무 작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대장 집에 계시는 게 났겠다고 생각했어요.」

「누구 마음대로?」

「네?」

종관은 미례가 소리를 지르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자유스럽지는 않겠지만 그 좁고 볼품 없는 오피스텔보다는
넓고 쾌적한 환경의 이곳에서 지내는 게 훨씬 나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더구나 자신의 목숨이 달린 문제이니 미례도 양보하고 얌전히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누구 마음대로 정한 거냐고? 내가 죽던 말던 상관말고 날 내보내 줘.
난 더 이상 이 미치광이 집에서 살고 싶은 마음 없으니 당장 날 안 내보내 주면 가만 안 있을 거야!」

미례는 벌떡 일어나 악을 썼다.

「누님이 아무리 싫어하셔도 소용없어요. 대장이 한번 결정한 일은 무조건 따라야해요.」

「그래서 지금 날 내보내 주지 못하겠다는 뜻이야?」

「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들어 드릴수가 없어요. 이번 일은 대장 말이 옳으니까요.
왜 자꾸 집으로 가고 싶어하는지 모르지만. 목숨보다 소중한 건 없다고 생각해요.」

종관은 확고한 의지를 담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자꾸 여기서 나가려 하는 거냐고?' 미례는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왜냐하면 두려우니까. 십 년 전의 악몽이 되풀이될까 두려우니까.
또다시 한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만신창이가 될지도 모르니까.
난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겪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으니까. 절대로...'